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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Dec 26. 2020

다음엔 뭐할 거야?

: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흘러가겠습니다.


'잘 지내십니까?'

핸드폰 액정화면 안에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이름이 떴다.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이고, 피디님~ 저는 잘 지냅니다ㅋㅋㅋ 오랜만에 니 이름 보니까 너무 반갑다'


최근 녀석이 새로운 작품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터라 궁금한 게 생겨서 연락을 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야말로 '안부'를 묻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의 반가움도 잠시 나의 근황을 묻기에... 드라마 제작회계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녀석은 잠시 말을 고르면서 '다음에 또 하실 건 아니죠?'라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내가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이다.

드라마 방영이 끝나자 그동안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너무나 자연스럽게 붙는 말.

'다음엔 뭐 할 거야?' '다음에 또 회계하는 건 아니지?'




마치 '너 커서 될래?'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질문을 언제부터 듣기 시작했을까?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뭐가 돼야 하는지를 고민했어야 했던 거 같다. 그때 난 딱히 뭐가 될지,  하고 싶은지 몰랐다. 다른 아이들은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것 같았지만 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자 무언가가 되기보다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 진로'를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답을 찾아야만 했다. 딱히 좋아하는 게 없던 나는 내가 못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지우며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결국 '실내디자인'이라는 과를 선택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진로'를 선택한 만큼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예기치 못한 풍파를 만나 목적지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포기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 여러 직장들을 전전하다 뒤늦게 영화일을 시작하려고 여기저기 면접을 봤을 때, 대부분의 피디님들은 짜 맞춘 것처럼 물었다. '앞으로 뭐가 되고 싶어요? 최종 목표가 뭐예요?'

제작팀을 지원했으니 당연히 그들이 정해둔 답은 프로듀서 혹은 제작자였겠지만 그때의 나는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기에 '작가가 되고 싶지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작팀인 거 같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 그중 친절한 피디님은 작가가 되고 싶으면 영화 현장이 아니라 작가 연수원을 가라고 조언도 해주셨지만 결국 난 제작팀으로 영화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10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아직도 '다음에는 뭐 할 거야?'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커서 뭐 될래?'라는 질문을 받던 그때부터 마흔이 가까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고 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뭐가 돼야 할지 늘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어쩌다 보니!! 영화 제작파트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이만큼 경력이 쌓이다 보니 누구나 '다음은' 프로듀서 혹은 제작자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는 프로듀서 혹은 제작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지만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내가 이상한 걸까?'


그리고 지금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드라마로 넘어와 다시 막내와 다름없는 제작 회계를 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더더욱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본다. 그리고 묻는다. '다음에 또 할 건 아니지?''너는 왜 야망이 없니?'

프로듀서가 아닌 제작 회계를 하면 야망이 없는 걸까? '야망이 없는 나는 잘못된 걸까?'


사실 지금까지 영화일을 하면서 절반 이상의 시간 동안은 회계파트 일이 죽도록 싫었다. 내가 회계 일을 시작한 건 고작 두 번째 작품부터였는데 그 작품을 끝내고 나니 사람들은 내게 계속 회계 일만 권유했다. 그래서 그때는 '회계파트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내가 부장이 되고, 실장이 되었을 때 회계 일을 잘한다는 게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드라마를 할 수 있었던 용기를 낸 것도 회계 일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드라마 한 편이 무사히(?) 끝나고 나니 이후에도 영화 일이든, 드라마 일이든 다시 회계 일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에게는 내가 앞으로 전진하기보다 뒤로 후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가지 않으면, 결국 뒤처진 사람이 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뒤처져서 천천히 걸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흘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뭐할 거야?'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요즘 내가 하는 답변이다.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나면...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뒹굴뒹굴거리거나, 귤을 까먹으며 밀린 드리마를 보거나, 만화방에 가서 하루 종일 낄낄- 거리고 싶다. 그런데 이마저도 코로나 때문에 어찌 될지 모르겠다.


'다음에...' 내가 다시 영화일로 돌아가 제작실장을 할지 혹은 이번 드라마에서 못해 본 다른 파트의 일을 할지 또 제작 회계를 할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프로듀서를 할지... 혹은 코로나로 인해 일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다른 일을 선택할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굳이 무리해서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솔직히 '다음에 뭘 할지!' 고민한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흘러간 적도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처럼 어지러운 시국에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나를 걱정해줄 수는 있지만 내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결국 어떻게 살지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음보다는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2020년 12월, 벌써 12월이다. 12월이라는 것도 잘 믿기지 않는데 그 12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그리고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안부' 인사들이 오고 간다.

코로나 때문에 더더욱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가 필요한 시기이지만... 이 시기를 잘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인사, 응원만 오고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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