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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Feb 21. 2020

나도 잘 살아보려고.

: 어쩌면 남들보다 더 아빠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현기증이 나더니 며칠 전부터 메스꺼움에 밥을 먹기 힘들어졌다. 원래 일할 때 안 아프다가 쉬면 여기저기 아픈 곳 투성이라 '쉬어서 아픈 거지!' 하고, 참아보려다 결국 병원에 다녀왔다. 그저 빈혈이 심해졌나? 생각했는데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말을 듣고 보니... 한동안 자잘한 걱정은 했지만 큰 걱정은 없이 살았구나! 싶어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창고를 리모델링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니 150만원만 주면 안 되겠냐는 거다. 금액을 듣고 놀라서 그만큼의 돈은 없다고 말했지만, 마치 떼인 돈을 받는 사람처럼 계속 연락이 오자 결국 4개월째 놀고 있는 딸한테, 아파서 병원 예약해놓고 전전긍긍하는 딸한테 그게 지금 할 소리냐! 말하고는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150만원에 대한 이야기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그 뒤로 아빠 전화는 못하고, 걱정은 되는지라 남동생에게 계속 연락을 하며 회사를 쉬고 누나한테 가 보라며 달달 볶더니만 급기야 어제는 울먹이셨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아빠가 여린 성격이라는 걸 알면서 심하게 말해버렸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돈을 조금이라도 보태줘야겠다!라고 아주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일할 까지 얼마 될지 모르는 시간을 계속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마음을 접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빠보다 내 삶을 지켜내는 게 더 소중한 딸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문득 오늘은 아빠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다.





네가 어른이 되면 다 말해줄게.


아빠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 시대의 많은 장남들이 그러하였듯 어린 나이부터 가장 역할을 하고, 생계를 책임지며,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27살,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풍족하진 않지만 나름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 1990년 후반, 시대에 휩쓸 아빠는 노조에 가입했고,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들 앞 서게 되면서  에서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아빠와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도망치듯 아는 사람 하나없는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아빠는 택시운전을 했다. 그 시대의 많은 아빠들이 그러하였듯 아빠도 돈을 벌기 위해 항상 오랜 시간 밖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네식구가 그럭저럭 먹고살만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어릴 때는 왜 가 매일매일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몰랐지만 조금씩 철이 들어가면서  원인을 알게 됐다. 겨우 살만해지자 아빠는 이번엔 지인들의 보증을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빠가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3번 뒤통수 맞았을 때, 나는 아빠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 호구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빠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결국 아빠 이혼을 했다. 아빠는 떠났고, 우리는 엄마와 함께 살았다. 더 가난해졌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다시 나타났다.

아빠는 택시운전을 그만두고 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장사가 제법 잘 된다고 말했던 아빠는 엄마의 얼마 되지 않은 보험금으로 옮긴 집의 계약서담보로 도박을 했다.


집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도망치듯 이사를 해야만했다. 이후로도 오랜 시간 동안 아빠가 또 언제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늘 불안해하면서 살았다. 그 불안이 커질수록 아빠에 대한 원망도 커져갔다.

 

"네가 어른이 되면 다 말해줄게... 나도 잘 살아보려고..."

아빠가 사고를 칠 때 혹은 술에 취하면 늘 하는 말이다. 나는 어른이 된다고 해도 아빠가 말해주는 '사정'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잘 살아보려고' 그랬다는 말이 그저 핑계로만 들렸다. 그때 나는 아빠가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줄 알았다.




나도 잘 살아보려고.


20살 갑작스럽게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평일에는 회사 다니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와중에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틈틈이 공부계속했다. 그러다 25살 영화일을 시작하고, 돈은 못 벌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명분을 움켜쥐고 경주마처럼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39살 된 지금, 친구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는 아직도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분명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내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문득문득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아빠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아빠보다는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저 내 밥그릇 하나 감당하기도 벅차게 살고 있다. 그러니까 '잘 사는 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허둥대며 살다 보니 아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참 가엾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누구나 잘 살아보려고! 선택을 하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 선택들이 늘 좋은 결과까지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게 인생이다. 상황이, 시대가, 사람이 늘 예기치 못하게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러니까 지금은 '나도 잘 살아보려고' 그랬다는 아빠의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미성년>에 보면, 엄마가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넌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니? 엄마정말 여자로서 불행한 사람이야... 열아홉에 너 낳고, 네 아빠 그렇게 되고, 빚 갚고 너 키우느라 내 인생 없었어! 너도 여자잖아. 너 내 딸이잖아. 근데 어떻게 남들보다 더 날 이해를 못해줘?"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엄마'만 생각했었는데 아빠 역시 같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너희 아빠도 너 같은 딸을 갖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너 같은 딸도 딸인걸."

애써 상처를 주고, 후회하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나를 오랫동안 지켜본 친구가 한 말이다.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에 대한 애정이 커질수록 아빠에 대해 애증도 커졌다.

삶이 힘들수록 누군가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에겐 그 사람이 아빠였다.  

분명 머리로는 아빠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마음 에 풀지못한 응어리가 남아있는지 아빠에게 살갑게 대하는 게 쉽지 않다.

 

너무 오랜 시간 아빠 딸로 살아와서 아빠에게 나 같은 딸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내가 아빠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아빠 역시 나 같은 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저 평범한 아빠를 바랐듯이 아빠 역시 조금은 다정한 딸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남들보다 더 아빠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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