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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Jul 11. 2020

친절한 가영씨.

: 너나 잘하세요.


가영씨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다. 기획팀이라는 파트의 특성상 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그 혹은 그녀들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든다. 가영씨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즐거웠기에... 때로는 시키지 않은 일도 먼저 나서서 하고, 때로는 자신의 일이 아닌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금은 제법 많은 작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가영씨는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 아침 일찍 출근한다. 오전에는 대부분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미팅을 나가고, 다시 들어와서 작품들의 진행사항을 점검하고, 새로운 아이템에 관련된 자료들을 조사한다.

'한 사람이 어찌 저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까?' 보고 있노라면 참 놀라운데...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면서도 언제나 밝고 씩씩하기에 나는 그녀를 매우 좋아한다.


지난 금요일, 야근을 하고 있는데 퇴근한 줄 알았던 가영씨가 다시 사무실에 들어왔다. 놀란 내가 가영씨에게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가영씨의 전화벨이 부산스럽게 울렸다. "아, 네~ 작가님~~ "

늦은 시간에 걸려온 전화는 1시간이 도록 계속됐고, 한참만에 몹시 지친 얼굴로 전화를 끊은 가영씨가 다크 라인이 짙게 내려온 나를 보며 웃으며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세요?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전 괜찮은데.. 가영씨는 괜찮아요?"

"저요? 저는 괜찮지가........ 않네요!"




'친절한 가영씨'


친절한 가영씨는 '힘들어하는 작가를 위해' 회의를 하며 아이디어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보조작가들이 해야 하는 일들까지 돕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작가는 당연히 보조작가들이 해야 하는 일들까지 가영씨에게 넘기기 시작했단다. 혹여 가영씨가 다른 급한 일들 때문에 못할 거 같다고 말하면 작가는 몹시 화를 냈고, 그럼 가영씨는 퇴근 후 집에 가서 밤을 새워 가며 작가가 부탁한 일들넘겨줬지만 정작 작가에게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고, 이런 일들은 그저 '당연한' 일이 되고 있단다.


"그건 가영씨 일이 아니라고 말을 해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런데....."


친절한 가영씨는 본인이 조금 힘들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그 '당연한' 일들을 계속했다. 그러자 작가는 개인적인 일들까지 가영씨에게 요구하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작가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시키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하고,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영씨는 작가에게 '감정 쓰레기통' 혹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

"지금 가영씨가 이 일로 너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봐요"

"........... 말을 해도 모르더라고요"


물론 가영씨도 이에 대해 작가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단다. 그런데 작가는 가영씨에게 "변했다!!"라고 말하며. "그럼 그만두라고!" 소리만 질렀다고 한다.

변한 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작가와 불편해지고.

긴 시간 함께 작업했던 작가와 이런 식으로 끝맺음하기 싫었던 가영씨는 결국 잘못한 게 없지만 사과를 하고.

그렇게 작가와 가영씨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니라 '갑과 을'의 관계가 되고 말았단다.


"그 작가 진짜 너무하네!"

"그런데 이 작가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과도 결국 이런 관계가 되고 말아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그러니까 친절한 가영씨는 지금 작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느라 정작 자신은 괜찮지가 않았다.


"도 잘은 모르지만... 내가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나에게 친절하진 않더라고요.

영화 속 대사처럼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고. 호의가 계속된 상태로 시간이 흐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가들에게 가영씨가 그저 만만한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아.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도 좋지만... "


한참 대화를 하다 보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왜요?"

"아니, 갑자기 나나 잘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나 잘하세요


사실 나도 요즘 경영팀과 불편한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중이다. 출근하기 전, 경영팀이 이전 작품들의 회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회사마다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에만 맞춰주면 굳이 부딪힐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러 회사를 다니면서 특히나 경영팀과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보완의 관계임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사이가 나빴던 적이 없었으므로 이번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가영씨에게 말했던 것처럼 내가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나에게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번 주 월요일, 회의실에서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고 나온 부장이 '사실 확인'을 위해 나를 불렀다.

"김과장이 요청한 서류를... 귀찮아서 못하겠다고 했어?"

"네?"


회의실에서 부장과 경영팀 사이 오고 갔던 이야기를 듣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말 같지가 않아서 말문이 막혔다. 이 회사는 자금을 출금하는 일은 모두 경영팀에서, 그러니까 김과장이 담당하는데 번번이 누락이 발생했다. 그래서 누락이 생길 때마다 체크를 해 줬는데 어느 날부터 출금일이 되면 이체내역이 내 노트북 위에 올려져 있었다.(아무런 말도 없이)


업체들에게 나가는 금액인데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체크해줬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같은 일을 너무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그래서 출금일 전날, 결제를 올렸던 서류정리해서, 파일로도 주고, 출력도 해줬다. 그런데 경영팀에서는 경영팀용 문서로 다시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럼 저는 같은 일을 너무 여러 번 해야 해요."라고 말한 것이 '내가 귀찮아서 못하겠다'라고 한 것이 돼버렸다.


물론 결제를 올리고, 결제 올렸던 서류들을 파일로 만들어 전달하고, 그 파일을 다시 출력해주고, 이체가 되면 실수가 없는지 다시 확인하는 일은 분명 '귀찮은 일'이다.

엄연히 내 업무는 결제를 올리는 것까지이고, 그 이후의 일들은 경영팀에서 처리할 일들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할 수 있고, 그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그 '귀찮은 일'을 지금까지 계속해줬다.

다만, 경영팀용 문서로 다시 작업하는 일까지는 못하겠다고 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귀찮아서 못하겠다'라고 한 적이 없거니와 '귀찮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호의'는 '적의'가 되어 돌아왔다.

다행히 앞뒤 설명을 들은 부장은 '그럴 줄 알았다!'며 김과장과 삼자대면을 하자고 했다. 나는 앞으로 내 업무 외 경영팀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삼자대면으로 시시비비를 따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감정싸움이 될 듯하여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또다시, 아무런 설명 없이 툭- 하니 문서가 하나 톡으로 전달됐다.

"제가 바쁘니까, 먼저 체크하세요"


바쁘다는 경영팀은 6시에 퇴근을 하고, 정신없이 급한 것들을 처리하고 밤이 되어서야 문서를 열어보니 법인카드 사용내역이었다. 처음 출근했을 때 누락분을 확인하고자 법인카드 사용내역을 요청했으나, 회사에서 진행하는 다른 작품에 대한 정보까지 있으니 '보완' 문제로 줄 수 없다고 한 바로 그 문서였다.


지금까지는 '보완' 문제로 경영팀에서 정리해 준 자료들을 기준으로 체크해서 전달했는데... 저번 달 유독 중복된 부분이 많아 확인 요청을 했었다. 그랬더니 이번 달 툭- '보완'이라는 그 문서를 나에게 던져진거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부장의 방문을 두드렸다.


부장은 '보완' 문서를 상의도 없이 나에게 준 것에 대해 그리고 서로 '협조'해야 하는 관계인데 '부탁'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경영팀의 일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 화를 내며, 앞으로 경영팀 일을 도와주지 말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로 경영팀 일을 도와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매일매일 숨 막히는 사무실 공기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경영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내 '친절함'은 왜 '적의'가 되어 돌아온 걸까?


이런 불편한 관계와 상황들이 숨 막혀서 그냥 내가 다 해버릴까? 싶은 생각도 불쑥불쑥 든다.

사실 이체 내역들을 여러번 체크해주는 일이나 법인 카드내역을 확인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이 바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도 있다. 나는 원래 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친절한 사람이 되고 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떠넘기는 것도 모자라, 당연하게 여기고, 모함하고, 불평불만만 쏟아내는 사람에게까지 친절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호의가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친절한 가은 씨도, 친절하고 싶었던 나도...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하세요"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으니 '나나 잘해야지'


요즘들어 유독 "친절해 보일까 봐-" 눈 화장을 짙게 했던 금자씨가 눈물 나게 공감이 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베풀었던 '친절'이 나에게 칼이 되어 돌아오고 나서야 다시금 나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나에게 유독 잘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지?' 싶다가도 그 친절함은 금세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행동들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다 그 당연함이 어느 날 조금 덜한 듯싶으면...'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지?' 하는 섭섭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섭섭함이 쌓이면 화가 난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베푼 친절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 적이 있진 않았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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