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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Aug 01. 2020

운수 좋은 날

: 남의 불행이, 때때로 나에게 위로가 된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창밖에는 후두득 후두득- 거친 빗소리가 들리고,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최대한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지난주에 '비온다'고 차를 가지고 나갔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길에 고생한 게 생각이 나서 집에 있는 우산 중에 가장 큰 우산을 골라 밖으로 나왔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오늘 하루를 예고하는 것 같은 그런 바람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옷과 양말이 모두 젖어있었다. 꿉꿉함에 애써 올라오는 짜증을 참고 있는데 이여사(=그녀의 별명이다)로부터 카톡이 울렸다.

"나 한정거장 지나침. 늦을 것 같아~"


7호선의 끝에 사는 이여사가 집에서 나와 9호선의 끝에 가까운 사무실까지 도착하기까지는 약 2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나보다 10살이나 많은 이여사는 노트북과 서류들이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을 메고, 매일 왕복 4시간여를 지하철 안에서 보낸다. 


이여사는 잠시 눈을 감았던 것도 아니고, 오후에 있을 미팅 자료를 보다가 한정거장을 지나쳤을 뿐인데- 

그 한정거장에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기까지 40분이나 걸렸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9호선은 급행이다.)

그리고 '역시나' 피할 수 없는 비바람에 흠뻑 젖었고, 주간회의가 막 끝난 뒤였다. 부장에게 소리를 듣고, 자리로 돌아와 애써 웃던 이여사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왜 이러지?"


겨우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이여사의 노트북이 켜지질 않는다.

"아이고. 이를 어째..............."




운수 좋은 날


정신없이 쏟아지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밥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거짓말처럼 비는 그쳐 있었고, '그냥 간단히 먹자'는 이여사의 말에 사무실 앞에 있는 쌀 국수집에 갔다. 그리고 '역시나'

밥을 먹고 나오니,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그쳤던 비가 주룩주룩- 다시 내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우산을 놓고 온 우리는 야속한 하늘을 올려보다 결국 뛰기로 했다.


그래도 오전에 양말이 다 젖어 사무실 슬리퍼를 신고 나온 나는  '(다시 젖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사무실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 그런데 슬리퍼가 앞으로 쭈욱~ 미끄러지면서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몸이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수많은 생각들의 결론은 '무조건 버텨야 한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가고, 꽉! 감았던 눈을 떴다. 다행히 나는 넘어지지 않았고,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옆에서 "으악-" 하는 이여사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뒤따라 오던 이여사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여사의 시선을 따라 가 보니, 내 슬리퍼 밑으로 새빨간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씨................"


어찌나 힘을 주고 버텼는지- 엄지부터 세 번째 발가락까지 살결이 제법 길게 찢어져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자각하고 나니 저릿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나보다 더 놀란 이여사 앞에서 애써 웃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용건'이 없으면 서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는 남동생이었다. 핸드폰 화면 속에 남동생의 이름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이 전화만큼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나'. 한동안 잠잠했던,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아빠가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었다. 비록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이 작은 사고가 앞으로 일어날 큰 사고의 서막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동생과 한참을 어떻게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일단 수습을 하고, 지켜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꿉꿉했던 아침이, 발가락 통증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날이 있다. 왠지 하루가 엉망이 될 거라는 걸 눈을 뜨면서부터 알게 되는 날.

그래서 그런 날은 더 조심하지만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여기까지가 그 슬픈 예감의 엔딩이기를 바라면서도 자꾸만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이여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 고?!!! "

통화를 하면서 천천히 붉어지는 이여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일일드라마의 엔딩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여사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최대한 억누른 목소리로 전화를 이어갔다. 이여사에게는 그날의 지각이, 망가진 노트북은 아무 일도 아닌 일이었다. 이 모든 일들은 슬픈 예감의 시작이었다. 


한참이 지나 사건사고들을 수습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자리로 돌아온 이여사의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그럴 때가 있다. 딱 봐도 안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것조차 어려운 때.

"시간이 지나면 분명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조차 거짓말 같아 말하기가 어려울 때.


평소 마시지 않는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나는 이여사에게 떨어진 불똥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비명소리를 질렀다. "뭐라고요????????????"  

나는 이해하기도 힘든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겪은 이여사는 그저 "어쩌겠어..."라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남의 불행이, 때때로 나에게 위로가 된다.


길고 길었던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침보다 더 많은 비가 쏟아졌다.

우산은 뒤집어지고, 뒤집어지는 우산을 붙잡다 보니 발이 물웅덩이에 빠졌다.

당연히 옷은 아침보다 더 흠뻑 젖었고, 붙여두었던 밴드가 발가락에서 너덜거렸다.

걸을 때마다 찌릿-하는 통증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이 상황이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지금- 비에 젖어 엉망이고, 발가락은 아프고, 아빠 일도 어찌될지 몰라 불안하고 답답하지만

분명 아직까지도 오늘 터진 사고들을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일 이여사가 생각났다 

나보다 이여사에게 오늘 하루가 더 길었을 것이고, 이여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 멀기만 할 거다.


그러니까 이상하게도 나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을 생각하니 내 불행의 크기가 조금은 작게 느껴졌다.

심지어 이여사의 하루와 비교하면 나의 하루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글귀가 생각났다.

 

남의 불행이, 때때로 나에게 위로가 된다. 

안 좋은 상황이 생겼을 때, 안 좋은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쉬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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