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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되고 싶은 미련곰탱이

사실 저 착하지 않아요!

by 정미선

저는 착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합니다.

이젠 그만 듣고 싶은 그 말, '착하다'...

저는 왜 착하단 얘길 듣는 걸까요?

제 안엔 서슬 퍼런 몬스터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땐 꽤 까칠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난스럽기도 하고, 못된 성질머리 때문에 엄마에게 많이 혼도 났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엄마는 제게 착하게 지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맏이로서 동생에게 양보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너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살 수는 없는 거다,

니 맘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을 거다'...

제가 성깔을 부리거나 떼를 쓸 때면 항상 하시는 말씀이었지요.

그땐 '난 그런 거 몰라!' 하며 듣는 둥 마는 둥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이야기들이 제 마음속에 많이 맺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하고 싶은 말들, 하고 싶은 것들을 참기 시작하게 되었으니까요.

돌이켜 보면 꼭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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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본격적으로 물러터지기 시작한 때는 아마 우울증을 앓던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게 의미 없어지고 희망도 꿈도 사라지던 날들...

그저 침잠의 반복과 나락으로의 깊은 추락만 존재하던 때였지요.

닫힌 제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상처받은 제 영혼은 어디서도 쉽게 위로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10년을 넘게 우울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회사에서 해고당했고, 세 번 입원을 했으며,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 했지요.

자존감은 바닥을 찾아 헤맸고, 자신감도 하나 없이 지냈던, 참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다 보니, 제 성격도 변하더군요.

마음을 열지 못하고, 남들을 대할 때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제 취향이나 생각들을 주장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는 식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좋게 말하면 반질반질한 조약돌, 나쁘게 말하면 미련곰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울증은 겨우겨우 벗어났지만, 그때 찾아온 미련곰탱이 녀석은 그때 이후로 쭈욱 제 속에서

버젓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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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함께 일할 때 우리 미선이, 참 착했지."

"언니, 언니는 참 착한 것 같아요."

"미선쌤은 참 착하세요."

오래전에 함께 일했던 방송작가 언니에게, 대기업에서 같이 일하던 후배에게,

또 학원에서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저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저도 알고 있지요.

'착하다'의 다른 말은 미련하다는 것을, 자기주장 없이 이리 휘청 저리 휘청인다는 것을,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마음속에만 꾹꾹 눌러 담아 놓는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지요.

위의 정의대로라면... 네, 저 착한 것 맞습니다.

그래서 제 속도 터지고, 남의 속도 터지기 일쑤랍니다.

언제부터인지 저는 화를 잘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겠구나...' 싶어져 그 마음도 이해가 되더군요.

화를 내봐야 큰소리만 나고, 서로 감정을 다치게 하는 말을 내뱉기 십상이니 내가 한 번 참고 가자...

하는 마음으로 화를 누릅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크게 다투는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습니다.

제 속이 문드러지는 것이지요.

속으로는 '이런 바보멍청이꼴뚜기해삼멍게 같은 놈아!!!!!'라고 별의별 욕도 해보고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다 내보지만, 겉으로는 잘 표현하지 않으니

그 속이 얼마나 답답하고 숨이 막히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저도 저를 생각하면 속터집니다.


남편은 제게 가끔 말합니다.

"자기는 지금껏 내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착해."

그런 말 듣기 싫대도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불쑥 이야기하곤 하지요.

그 말속엔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 속상했던 세월을 이해한다'는 뜻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도 좀 여우처럼 살아왔기를, 그리고 그렇게 살기를 많이 바랐습니다.

똑 부러지게 명쾌하고, 앞뒤 계산 빠르며 실속도 잘 챙기는, 그런 멋진 여우...

전 그런 여우가 너무 부럽습니다.

미련퉁이처럼 살면 손해 보고 답답한 일들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늘은 참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물었거든요.

"자기야, 난 여우야, 곰이야?"

그랬더니 오늘은 의외의 대답을 합니다.

"곰이기도 하고, 여우이기도 하지. 곰 같은 데 가끔 여우 같은 짓을 할 때가 있거든."

알 듯 모를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남편에게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제 안에도 여우 같은 모양이 있긴 하나 보네... 싶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거든요.

저라는 사람의 탈을 쓰고 있는 이 미련곰탱이는 오늘도 여우 같은 삶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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