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등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의 편린
"야, 이 못된 계집애야.
어디서 들으니, 너는 부모한테 딸 구실도 못한다더라.
너는 평생 식구들에게 해만 끼쳤어.
...
어제 전화 통화에서 엄마가 또 악다구니를 쓰십니다.
제게 화가 나거나 불만이 있으실 때면 늘 저 레퍼토리를 반복하십니다.
몇 해 전,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막내아들을 잃고 나서는, 그 화와 분노를 어쩌지 못해서
이렇게 괴팍하게 가슴 찌르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으시지요.
그러나 저는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말대답을 해봐도, 저도 맞받아 화를 내봐도
식구들에게 평생 짐이었다는 이야기 앞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지요.
엄마의 그 아픈 말이 사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는 정말 그토록 짐 같은 존재일까요?
제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저는 한없이 작고 쭈그러들기만 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살면서 제대로 맏딸 구실을 하거나 두 남동생들에게
든든한 누나이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다 보니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빴고, 집에서 나와 고된 서울살이를 하느라
부모님께 변변한 용돈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식구들에게 제가 짐이 되기 시작한 건
10년이 넘도록 앓아온 우울증이 심해지면서부터였지요.
직장에서도 해고를 당하고, 의지할 곳도 별로 없었던 탓이었을까요?
병세가 심해져 대학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막내 동생이 제 간호를 자처했습니다.
밤이면 제 침대 옆 좁다란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이면 일어나 시험 준비를 위한 공부를 하러
노량진으로 향했습니다.
저녁이면 또 어김없이 병원으로 찾아와 저를 보살폈구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간이침대에서 곤히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지금 이 녀석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울컥 목이 메었습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던 터라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제겐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시험에서 떨어진 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해 어두운 낯빛의 동생을 보며
정말이지 면목없고 미안한 마음에 한마디 위로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퇴원을 하고 나서도 제 병은 쉽게 낫질 않았습니다.
다시 병세가 심해서 괴로웠던 어느 날 밤, 저는 참 못나고 위험한 행동을 했습니다.
어떻게 알고 허겁지겁 제게 찾아온 두 남동생은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벅벅 닦으며 말했습니다.
며칠 후 저는 침대와 책상만 덜렁 들고 두 남동생이 살고 있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두 동생들의 사글셋방에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마흔이 다 되도록 두 동생에게 짐덩어리만 되었던 저를 저는 미치도록 미워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엄마에게도 저는 참 못난 짐이었지요.
홀로 서울살이를 하는 제가 행여 먹을 것 변변치 않아 굶지나 않을까 갖은 반찬 바리바리 싸들고 제 자취방을 찾아오신 엄마에게 저는 한 번도 반가운 얼굴로 맞은 적이 없었으니까요.
병약하고 차멀미도 심하게 하시는 분이 그 무거운 걸 들고 안성에서 제가 사는 달동네까지 꾸역꾸역 오셨을 걸 생각하면 너무도 속상해서 저도 모르게 신경질을 부리곤 했습니다.
돌아서는 엄마는 수없이 눈물을 삼키셔야 했지요.
언젠가 한 번은 결혼을 하겠다고 남자를 데리고 엄마에게 간 적이 있습니다.
통장에 1원 한 푼 없던 엄마의 속도 모르고, 결혼식장이니 예물은 어떡할 거냐고 징징대던 제가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했을까요.
엄마는 단칼에 그 결혼을 반대하셨고, 허름한 13평 주공아파트를 본 남자도 기겁을 해서는
바로 줄행랑을 쳤지요.
철딱서니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던 못난 딸내미는 그 일로 엄마와 한동안 연락도 안 했으니,
제게는 참 많은 콤플렉스와 못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쓰러지거나 꺾이지 않았던 건 저를 일으켜 세워준 많은 '긍정의 힘'들 때문이지요.
그러나 짐짝 같은 제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쉽게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곤히 잠든 남편의 등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요즘도 그렇습니다.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나이임에도 어른스럽지 못하고,
가진 거라곤 암세포가 득실거리는 병든 몸뚱이 하나뿐인 저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일지 생각하면
그가 가엾어서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언제가 되면 제가 '짐'이라는 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참 마음이 무거운 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