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사나흘 정도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을 만큼 고요한 평화가 느껴지는 날이 있다. 주로 시점의 앞이 어수선했거나 조만간 뒷 시점이 어지러울 예정인 구간에서 그런 감정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대단히좋은 일이 있지는 않다. 횡재를 누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 너무 아무 일도 없이 평범하기에 금방 달아나버릴까 싶을만큼 지키고 싶고 소중한 시간이라 여겨지는 날들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정서함양을 위해 학교주최로 시행한 1박 2일 일정을 소화한 적이 있다. 곧 고3 수험생 생활을 앞두고 고2들을 대상으로 수험생으로서의 다짐을 굳건히 하는 프로그램을 재학 중인 학교에서 타 기관에 위탁했던 것이다. 얼마나 임팩트 없던 학교선정 프로그램의 실패작인지, 자잘한 기억력이 매우 좋은 나는 그런 곳에 갔었다는 사실과 나의 어떠한 말에 반 친구들이 오~~ 했다는 사실 외 그 어떤 프로그램도 상황도 분위기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단 하나 호칭조차 애매한 옛 표현으로 수련원 교관선생님 정도로 기억되는 여자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 반에는 소주를 몰래 가져와 이불 안에 숨기고 담배를 가져와 레모나씨 통에 넣어두는 등 그 당시 지참하지 말라했던 것들을 꼭 가져와 과시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객기일 수 있겠으나 굳이 그 1박 2일 짧은 일정에 가져와야만 했는지,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걸 하고야 마는 소위 논다 아이들. 물론 소심한 나는 그들에게 직접 말은 못 했지만 말이다.
무튼 늦은 밤시간이 되자 여자교관은 15명이 한꺼번에 묵는 다소 넓은 우리 방에 들어와 너희들의 행복은 어떤 것이냐 물었다. 그 질문이 프로그램상 일부였는지 그 여자교관선생님의 개인 질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고민, 고뇌를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에게 물어 색다른 답을 찾고 싶었을 수도 있다.
동그렇게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제 곧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열여덟 학교에서만큼은 조용했던 난 딱히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었지만 그날 그 순간만큼은 얼른 내 차례가 돌아오길 소망했다. 처음부터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행복은 어떤 것인지.
"저는 아무 일 없이 마치는 하루,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제일 행복합니다."
"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라고 여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보다 조금 더 어렸던 몇 년 전에 당하던 왕따를 당하고 있지 않는 고등학교 2학년의 지금, 지금은 접은 꿈이지만 그때 나는 출가해 스님이 되길 바랐다. 어린 시절부터 모태신앙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부모가 내게 출가하길 바라진 않았다. 오히려 아빠는 엄마나 나의 종교생활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편이 더 강했다.나의 정상적인 인간관계의 기준은 왕따인지 아닌지였다. 그보다 어린 시절 당했던 왕따나 따돌림이 비해 지금 고등학교 2학년시절은 무난하다 여겼으니 어쩌면 과한 행복일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교우관계가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출가를 준비하던 내게 비구니스님은 고등학교과정은 성실히 마쳐야 받아줄 거란 말에 열심히 공부하고 무엇보다 성실한 자세를 이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따로 사교육을 고등학교시절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다였고 딱히 쉬는 시간에도 놀친구들이 없으니 자리에 앉아 전 시간에 배운 과목을 복습하거나 시험을 준비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당시 나는 2학기 수시를 준비 중이었는데 공부를 매우 잘했기 때문이 아닌 관련학과 선정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했다. 수시는 전반적으로 내신성적이 월등히 높은 친구들이 선택하는 입시제도다. 하지만 내 진로는 출가한 스님이었기 때문에 행자생활을 마치고 은사스님의 지원을 받아 중앙승가대학교에 진학할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결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지원했고 1차 합격자를 지원자의 5 배수까지 뽑는 특성상 상당히 무난했던 내신성적을 가지고도 2차 면접에 응시할 수 있었다. 수능으로 응시해 입학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출가가 너무도 하고 싶었던 나는 그 몇 달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신행활동 경력이 학생시절의 대부분인 나는 성적은 몰라도 경력은 자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이 가능했다. 다만, 이런 불교학과의 특성이나 내 진로를 모르는 소위 말해 반에서 논다는 그 무리들은 내 부모가 동국대 입시담당자와 결탁이 되어있을 거라느니, 수시 1차전형 합격이 거짓말일 거라느니 웅성거렸다. 심지어 쉬는 시간 공부를 하고 있던 내 귓가에서 얘는 쉬는 시간마다 공부하는데 전교 1등은커녕 반 1등도 못한다고 얕잡아보기 일쑤였다. 물론 그 아이들이 논다는 이유로 조금은 무섭기도 했지만 출가한다는 이의 마음가짐은 이런 말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이후 느낀 건데 여전히 그 아이들은 사람을 겉보고만 판단하며 살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어 아빠와 편의점에 갈 일이 있었다. 아빠는 당시에도 키가 크고 멀끔한 외모였다. 당시 아빠는 다른 곳에 들렀다 퇴근하느라 그날따라 양복을 입고 있었다. 평소엔 일반 티셔츠에 기지바지 같은 걸 입고 커다란 사각검정가방을 메고 다닌다. 더욱이 아빠는 결혼을 매우 일찍 했기에 젊었고 머리숱도 풍성했으며 자녀대상 한정 웃는 인상에 키 가 컸던 아빠를 그들은 위아래로 훑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훑고 아빠를 계속 쳐다봤다. 별명이 개구리였던 안경 쓴 까무잡잡한 여자아이 (이름도 기억하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하... 아씨.. 아빠인 거야?"
혼잣말치고는 너무 컸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의역해보자면
"저렇게 멋진 사람이 쟤네 아빠라고?"
더 우스운 건 그때 아빠는 엄마와 냉전 중이었고 아빠가 지은 빚으로 인해 10년 넘게 가정불화가 지속되고 있던 중이었다. 가정불화가 십수 년 지속돼도 매 순간이 불행하진 않다. 아빠도 사람이었으니 딸에게 못할 이유는 없으셨겠지. 하지만 그 무리들은 겉모습만 보고 내가 대단히 성실하고 번쩍번쩍한 외모를 가진 아빠의 딸로 아빠의 양복차림만 보고 아빠의 직업, 우리 집의 재산을 예상해 봤을 것이다.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게 된 나는 여전히 평범한 삶이 그립다. 한동안 살아오면서 내게는 평범한 삶조차 허락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가둔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평범한 건 아무 일이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삶이라는 건 재물, 정서 그 어떤 면에서든 과하고 부족한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고 평범의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달라서 기준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가끔은 스무 살 때도 알던 그 사실을 두 번째 스무 살을 맞이하려는 지금 시점에서는 잊어버리기도 한다. 과욕이 부른 눈가림일지 모른다.
아무 일이 없어 거리낌 없이 스르르 잠들 수 있다는 게 큰 행복이라 말하던 방송인 홍진경 씨의 말을 나도 공감한다. 사실 그 거리낌 없는 하루의 삶을 위해 어제를 무리하기도 하고 내일을 당겨 쓰기도 한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아무 일 없다는 것이 꼭 행복이라 단정 짓기보다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단지 지금, 현재만을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정답임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