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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Sep 22. 2024

호불호의 장벽을 허무는 마음

삶의 경험, 깨달음이 함께 하면 가능한

스스로 정의내려 '나'를 알아갔던 기억은 그리 많지않다.


이를테면 성격이 급하고 정리에 대한 강박이 다소 있는 편이며 세 번 이상 같은 말 하게 하는 상황을 싫어하는  모습은  스스로 돌이켜 깨닫게 된 것이 아닌 주변에서 넌지시 알려준 것 들이다. 다른 이의 말을 듣고 내가 그런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아,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정도로 느끼는 거다. 그 말을 되내다보면 어느새 각인 만큼 훅 박히는 말도 있다. 아직 나란사람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깨닫지 못했던 그때의 나같은 유형의 사람에게는 다른이의 판단, 말이 훨씬 더 힘이 세다.


'매 순간 깨어있으라'는 말은 불가에서도 심리상담가들도 정말 많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래야 스스로 더 깊고 명확히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나로 느끼기보다 제3자 입장에서 이해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지금 내가 걷고있구나. 지금 내 심장이 더 빨리 뛰고있구나...'와 같이. 관찰자 시점으로.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늘 깨어있으라는 말은 불가의 선승에게서나 듣던 말인데 요즘은 유튜브에서도 아주 많이 거론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상 살아가는 이들이 정신없이 바쁜 사이클을 돌며 스스로를 돌볼시간이 없다는 의미이며 '자! 지금부터는 나를 돌보는 시간!' 이라는 타이틀을 달며 살아갈 시간조차 없으니 매 순간 집중해서 자신이 어떤 언행을 하며 살아가는지 그때그때 알아차리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느꼈던 내 모습중 하나는 독서장르편식이 매우 심했다는 것이다.


다독하고 장르편식없이 모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님이 확실했다. 다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시나 소설은 따분하고 심오한 내용을 갖고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나와는 맞지 않다고 느꼈다. '심오한 생각'이라어디서 뒤지지 않는 나였지만 이내 심오한 생각이 아니라 잡다한 생각을 주로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대 때는 자기 계발서에 빠져 살았다. 약 18년째 갖고 있는  '20대 여자의~' 시리즈가 현재 '언니의 ~ 시리즈의 작가인 김미경 작가가 동일인이었음을 비교적 최근에 알았다. 이렇게 그 나이대에 최대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고 내가 부족한 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질문에의 답을 찾기 위해 퍽 열심히 고뇌하던 시기였다. 주로 해결책, 고칠점 위주의 말들이 적힌 자기계발서를 꽤 많이 읽었으며, 그런 류의 장르가 아니라면 시험을 앞두고  기본개념 및 이해를 이한 원문을 찾아 읽기보다 기출문제를 열심히 푸는 스타일. 핵심을 알기보다 문제의 유형을 익혀서 고득점을 얻기 위한 방편에 눈을 돌리는 나였다.


독서장르 편식이 심하다는걸 자각한 후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일부러 사고의 틀을 깨보기위해 평소 관심을 전혀 두지 않던 분야의 지식들을 '지식'으로가 아닌 '교양'으로 가볍게나마 접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길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우주과학, 미술사학 분야의 책을 사 왔다. 이십대 중반의 결심치고 꽤나 유연한사고를 가진자 처럼 느꼈다. 책 구입후 집으로 돌아와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이개월 여를 새책으로 책상에 놓아두다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첫 장을 열었다.  


작은 글씨 촘촘한 행간을 볼 때마다 하품과 함께 곧이어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바로 책장을 덮었다.


그때의 교양정보 습득에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이제는 안다.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전문가가 쓴 요약본을 읽는 것은 정말 소귀에 경읽기나 다름없었음을. 그래도 그 시도는 지금생각해도 박수쳐주고 싶다.




마음을 표현하기에 시만큼 좋은 게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시는 뭔가 장황한 형용사와 비유의 향연인 것 같아 어쩐지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나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겉멋 부리는 문학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었다. 왜 말을 베베 꼬는 것인가? 그냥 직언 하면 될것을 왜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걸까? 하지만 좀 더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시만큼 상황, 배경, 마음을 압축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장황이아닌 압축,함축의 글이 시였음을 이제야 안다. 그렇게 스스로 시에 대한 편견을 나름 조금은 깨부술 수 있었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소설에의 낯 뜨거운 장면, 자극적인 장면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글만으로도 상황을 묘사하고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뒷부분을 궁금하게하는 힘을 갖게 하는게 소설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런 수순으로 흘러가는 소설은 굉장히 글솜씨 있는 작가의 작품일 텐데 되려 나는 순간순간의 장면에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19금으로 대변되는 작품을 찾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보통의 청소년, 성인이 읽음직한 소설에도 내 기준 자극적인 장면들이 나오면 나는 책을 덮거나 이내 눈을 질끈 감곤 했다. 특히 이야기가 연속성 있게 전개된다기보다 장면이나 배경의 바뀜이 있는 구간에서 나는 집중력이 거의 수직으로 저하됐다. 학교 다니던 시절 '작자의 의도는?, 작품의 주제는?'와 같이 질문의 답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흥미가 팍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 역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집중력은 개인의 문제였고, 낯 뜨겁거나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역시 그런 장면들이 우리 삶의 일부임을 생각지 않고 그저 생경하거나 불경하다고 생각한 나의 갇힌 사고방식의 문제였음을 안다.




현재는 대부분의 장르에의 흥미를 갖고 있다. 다독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호불호 명확한 내게 십수년간 무관심의 영역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는건 신기하고 기쁜일이기도 했다. 글을 제대로 배워본적도 써본적도 이곳에 약 2년간 적어본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일단 쓰고보자 라는 태도는 문학적 시점에서 엉터리 글일지언정 용기내어 써볼수있게하고 이내 소설이란 장르도 시작해 볼수 있게 했다. 최근 연재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것도 그 때문이다.


 호기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하고 흥미는 사람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 마음을 열어 유연한 사고를 갖는다는건 물리적으로 마음을 열어젖히는것이라기 보단 어떠한 형식으로 바라보던 기준이 바뀌기도하고 바뀐 나의 기준, 상황을 편견없이 받아들일줄아는 것임을 느낀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나를 알아가는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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