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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Jan 19. 2021

그가 나왔다

그는 운전을 하고 있었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조석을 뒤로 조금 젖힌 채 편하게 음악을 듣고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이 몇 번 오갔고, 웃고 있는 그의 옆얼굴을 힐끔 거리며 나 역시 만족스럽게 따라 웃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목적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없이 충만했다. 몇 차례 비슷한 풍경들이 지나가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피해 그의 오른쪽 팔 밑으로 파고들었던 것도 같다. 간지럽다고 투덜거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삐쭉거렸던 기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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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뜩 눈을 떠보니 우리는 손을 잡고 어느 해변을 걷고 있었다. 제법 큰 나도 기대거나 매달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키를 가진 그의 팔을 잡고 걷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지치고 버거운 순간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우리가 대견했고, 아직도 그가 내 곁에 있는 게 맞나 싶어서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손톱의 모양과 크기, 내가 알고 있는 점의 위치... 정말 그 사람이 맞구나... 확신을 하고 나서야 말갛게 웃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누가 간주 점프 버튼을 누른 것 마냥 해변의 모든 사람이 지워지고, 밤의 해변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려고 해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내 안이 소금으로 가득한 것처럼 입이 짰다. 너무 답답해서 컥컥 거리며 숨을 헐떡이자 이번에는 수많은 돌들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뱉어도 뱉어도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는 돌멩이들, 그를 부르려는 내 목소리는 돌멩이끼리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버리고, 애타게 부른 그의 이름은 어둡고 축축한 무덤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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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가 지난밤 나의 꿈이다. 요즘 들어 그의 꿈을 자주 꾼다. 합리적인 이유를 대보자면 그건 내가 그의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일 거다. 감정을 치워내는 데 있어 몹시도 지지부진한 나는, 그를 완전히 잊기까지,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를 적당히 지워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그랬다. 한 사람을 잊으려면, 그 사람과 만나온 시간의 절반 정도는 지나야 한다고.. 나는 10년을 만났는데 그럼 5년 이상이 걸린다는 이야기인가...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술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였었는데, 그때 목울대가 미친 듯 뜨거웠던 건 알코올 때문이었을까, 별안간 떠오른 그의 얼굴 때문이었을까. 

헤어지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엔 이상하게 그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웠던 사람과 멀어진 지 30일 정도 됐을 뿐인데, 그냥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누군가와 사랑을 했지만, 그 누군가가 더 이상 누군지 모르겠다는 혼란함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가 같이 듣던 멜론 앱의 비밀번호를 바꾸고, 넷플릭스 계정에서 내 이름을 삭제하면서 나를 차츰 정리해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시간은 더 흘러 6개월이 된 지금, 왜 나는 지금에 와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글을 쓰면서까지 괴로워하는 것일까. 왜 별안간 떠오르지도 않던 그의 머리스타일이며, 눈 모양, 비염 때문에 환절기면 코를 훌쩍이던 것과, 웃을 때 윗입술이 얇아지는 것까지 생각나는 걸까. 왜 나는 혼자 병신처럼 이미 지나가도 저 멀리 지나가버린 뒷면을 붙잡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멈춰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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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마 마지막 장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헤어지자는 어떤 마무리가 없이 이별했다. 그도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연락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는 내게 오래 만나면 ‘자연소멸’이 답이라고, 그러지 않으면 이별할 수도 없다면서 오히려 잘됐다고 말했지만 나나 그나 오랫동안 이 ‘찝찝함’ 은 피할 수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을 받아들인 건, 더 이상 예전 같을 순 없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지나갔고, 이별을 떠안았으며, 그 무게가 시간에 날려 가벼워질 때까지 감당할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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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 눈을 뜨고 한동안은 소리 없이 울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암막 커튼 덕분에 방이 눈동자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만든 무덤에 내가 갇힌 기분이 들었다는 것도 고백한다. 쉴 새 없이 입술로 들이닥치는 눈물에 입안이 짰고, 그게 괴로워 입을 벌리자 몸에서 쉬이 쉬이 소리가 났다. 그때 내가 뱉어낸 돌멩이는 지금도 내 침대 어딘가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내가 잠든 사이, 가슴을 수십 번이고 짓누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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