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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함께 일했던 디제이가 ‘철이 든다는 건 계절을 안다’는 의미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뭔 소리냐는 얼굴이었을까, 짐짓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을까. 어쨌거나 나는 그때보다 조금 늙었고,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으며, 포기하는 법을 배우며 고여있다.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올랐을까? 생각의 줄기를 쫓아가 보니 요 며칠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인 듯하다. 한 겨울도 그렇다고 봄도 아닌, 애매한 계절을 살 때마다 왜 가슴속이 텅 빈 공갈빵 같아지는지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그럼 너는 대답하지 않는 것 또한 대답이라고 말해주려나. 그럼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어디에 말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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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 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다짐할 때마다 늘 다짐에 실패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간절함의 문제라고 말하겠지만 세상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무력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넘어져 있는 내가 보기 밉지만, 원하는 만큼 넘어져있어도 된다고 말하는 반대편의 자아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오늘 넘어져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자아를 택했다. 다짐과의 만남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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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냐고 묻는다면 ‘후회’로 살아간다고 말할 것이다. 그때 입을 열지 말걸, 그때 전화하지 말 걸, 그때 떠나가도록 둘 걸, 그때 조금만 더 참아볼 걸, 뒤를 돌아보는 마음으로 앞을 내다본다. 좀 더 낫게 실패하고 싶어서, 좀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서. 되감기와 재생 버튼을 몇 번이고 반복해 누르다 보면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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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거리 딸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빠는 내게 피부 관리도 받고, 가고 싶은 데 가고, 책도 읽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라고 하는데 - 그래서 나도 그래 볼까 하고 밝게 대답하곤 하는데, 정작 해야 할 말을 서로 못 하고 있다. 괜히 시선을 둘 데가 없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아빠 손을 쳐다봤다가, 하얗게 터버린 손끝에서 그만 또 무너져 버렸다. 피부 관리는 무슨, 당신 핸드크림이나 잘 바르고 다니지. 눈물을 참는 법을 배워야겠다. 주먹을 꽉 쥐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