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힘든 거 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이 노는 것을 가만히 보다 보면 여자인 내 입장에서는 저 아이가 사람인가 싶을 때가 많았다.
너무나 거칠고, 생각 안 하고 일단 몸부터 나가며 그렇게 움직였다 하면 바로 부상으로 이어지는 그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이 되어 덩치가 커지기 시작하니 앞으로 중학교에 갈 텐데 어쩌나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걱정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즈음 동네 또래 엄마들의 최고의 화두는 '중학교' 였으니까.
요 동네 사는 애들은 몇 동까지는 무슨 중학교에 배정을 받는다더라부터 OO중학교 애들은 거칠고 폭력적이라더라 XX중학교에서는 패싸움이 있었다더라 왕따를 시킨다더라 등등
소문이 어찌나 무성한지 듣다 보면 우리 애는 홈스쿨링을 하거나 아니면 당장이라도 데리고 이민을 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날이 소문이 무성해지는 만큼 나의 근심도 커져만 갔다.
결국, 큰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쯤이 되어 나. 름. 학군지로 이사를 결정했다.
내가 원한 것은 분위기가 거칠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고 원만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것이었다. 별다른 재주가 없어 공부를 좀 해야 하니 학습 분위기도 적. 당. 히. 좋은 곳으로.
다행히 아이들은 중학교에 잘 적응했고 기대했던 대로 학교와 학원가 모두 면학분위기가 조성된 나름 긍정적인 분위기의 동네에서 좋은 친구들과 지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바쁘다. 바빠도 너무 바쁘다. 이것이 문제다.
아이들 대부분 하교 후, 자연스럽게 학원에 가고 공부하는 분위기인 것은 장점인 듯싶은데, 아이들이 할 일이 너무 많은 게 단점이다. 학교 숙제, 학교 수행평가, 학원 숙제 및 각종 독서 기록 등등 국영수도 해야 하고 내신대비도 해야 하고 고등학교 선행도 해야 하고 특목고나 자사고를 준비한다면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상장도 타 두어야 하니 준비할 게 산더미다. 고등학생이야 뭐 두말하면 잔소리고.
아이들은 학교 갔다 학원 갔다 집에 오고 다시 학교 가고 학원 가고 집에 오고... 계속 이 생활의 반복이다.
사이사이 학원 레벨테스트가 있는 곳도 대부분이라 이 또한 준비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늘 피곤하고 얼굴은 짜증과 불만이 가실 틈이 없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이나 식사 메뉴를 준비해 두거나 미리 학원 스케줄을 정리해 두고 아이가 필요한 교재들을 구입해 두거나 하는 정도의 신경을 써주는 게 가능하다.
가끔 아이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서 시간이 맞으면 외식을 하거나 같이 게임(농구, 노래방, 오락실 등)을 하거나 한다. 그마저도 아이가 고등학교에 가니 시간 맞추기가 하늘에 별따기 수준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에 돌아올 때면 늘 아이의 얼굴을 살핀다.
아이의 얼굴을 봤을 때 '나한테 말 걸지 마'라고 이마에 딱 써붙여 있을 땐 피하는 게 상책이다. 대면대면하게 스치듯 피하거나 애써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거나.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그래야 사단을 막을 수 있다. 나름 윈윈 전략이다.
아이의 얼굴에 별 기색이 없거나 혹은 아주 가끔 보이는 희미한 미소의 흔적 같은 게 있어도 방심은 금물이다. 그놈의 기분은 시도 때도 없이 널뛰기를 하기 때문에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대체로 아이는 잘 다녀왔냐고 반갑게 인사하는 엄마에게 다음과 같은 패턴을 보인다.
퉁명스럽게 단답식의 대꾸를 하거나("네"), 소 닭 보듯 쓱 보고 쌩하고 지나가거나, 어떨 땐 못 들은 사람처럼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 보란 듯이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물어보고 싶어도 닫힌 아이방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엄마도 웬만하면 힘든 아이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다.
아이가 힘든 것 안다. 안쓰럽다. 사춘기의 특성상 그럴 수 있는 나이란 것도 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의 도가 지나칠 때가 있거나 엄마도 기분이 굉장히 별로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도 닦듯 쌓아 올린 그동안의 인내가 한순간에 바닥을 치며 분노로 변하는 게 바로 그 순간이다.
갑자기 나타난 분노가 활화산처럼 솟구쳐 아이에게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해달라는 거 다해주는데.
좋은 학교 보낸다고 집 이사와
좋은 학원 알아봐서 원하는 대로 다 보내줘
좋은 분위기에서 공부한다고 스터디카페도 보내줘
필요한 거 안사준 게 있나 옷이며 신발이며 다 해줬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고! 아주 호강에 겨웠지, 네가!
나 때는 학교도 버스 타고 한 시간씩 걸려서 다녔어
학원? 미안해서 보내달라고 시원하게 말해본 적도 없다고!
학원 하나라도 보내주면 미안해서 맨날 고마워하며 다녔어
결석은 개뿔! 지각도 한번 한 적이 없었다고!
스터디카페가 뭐야! 도서관에 새벽부터 가서 줄 서서 들어가 공부했어!
우리 엄마가 나처럼 해줬으면 서울대 갔겠네!
지 공부 지가 하면서 무슨 유세야?! 유세가!
공부해서 나 주니?! 나 줘?!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선을 넘어 버리면 분노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대충 이런 종류의 레퍼토리가 분산되어 아이에게 쏟아진다.
(한 번에 다 하지는 않는다. 절대. 나도 미래를 기약해야 하니까)
물론 나도 안다. 얼마 못 가 후회하리라는 것을.
말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후회하지만 정말 답이 없다.
그 순간 나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
아이의 스트레스가 공부뿐만이 아니란 것은 안다.
하지만 공부 스트레스만이라도 어떻게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