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 다녀왔다. 그 마을은 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
노란 은행나무 만연한 온양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이제는 아기를 안은 외국인 새댁들이 이따금 정류장에 앉아 다가올 버스를 바라보는 것이 거의 전부인 한적한 시골길이 이어진 창에 기대 눈을 멍하니 포갰다. 내가 달고 온 지겨운 도시의 꼬리 끝에서 오늘은 봄 같은 기운의 가을이 한 번씩 덜컹거렸다.
정말이지 어렴풋한 길을 지나, 또 왠지 반가워 보이는 낡아버린 콘도와 온천탕들을 지나, 또 마을 가까이 들어서는 새로 닦인 길들을 지나서 버스에서 내리자 어린 시절 맡았던 정겨운 냄새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내가 알던 그 길이 있었고, 내가 아는 길이 아닌 그 길이 있었다. 생경했고 그리웠고 서운했다. 왜인지 가슴에서 걸어온 무수한 길들이 신작로에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다.
시멘트 벽에 페인트를 칠한 그 위에 붓으로 눌러쓴 가게의 상호들은 세월을 견디지 못했다. 아마도 천 번의 비나, 만 번의 바람, 그것을 안은 밤들을 지나 바래고 떨어지고 지워졌으리라. 소외에 쓸려간 마을의 풍경이 쓸쓸했다.
더 이상 철마의 엔진이 떨지 않는 그곳. 시골 사람들이 보따리를 들고 표를 끊어 앉아 알이 작은 스테인리스 손목시계를 힐끔거리며 대합실의 시간표를 되뇌지 않는 역에는 이제는 기차 대신 아이들이 페달에서 작은 발을 떼는 레일바이크가 있는 외로운 관광지로 바뀌었다. 마을에 하나 있던 폐도고역의 그 약국은 사라지고 없었다.
역 맞은편을 건너 모퉁이를 돌면 산에서 주워온 오래된 바닥돌을 깐 좁은 길을 지나, 떨어져 나뒹굴어도 주워갈 이 없는 작고 늙은 호박이 언제 치워질지 모르는 길섶의 잠을 자는 짤막한 오솔길을 지나면 십여 년 전 창호문 걸쇠에 자물쇠 하나로 굳게 잠겨있던 흙집이 사라지고 낯선 노란 담벼락으로 둘러진 집이 있다. 내가 세상을 구하겠다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슈퍼맨처럼 뛰어내렸던 이층집 이장님 댁도 어디 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여름에 외할머니가 장에 가느라 나를 맡겨둬 썰어준 수박을 겁이 나 온전하게 먹지 못했던 서늘했던 이웃집 할머니 댁에선 늙어가는 남자 둘이서 실컷 자라다 말라비틀어진 가지 더미들을 줍고 있었다. 겨울에 빤스 바람으로 쫓겨나 콧물을 흘리며 숨어서 몸을 떨던 마을 성당으로 가는 오르막 그 중간의 구석은 오르막같이 보이지 않았다. 어설프게 섭렵한 세상에 대한 내 마음만큼이나 거기 모든 게 작아져 있었다.
외할머니의 뒤뜰을 찾았는데 뒤뜰이 사라지고 없다. 낯선 무화과나무의 열매만이 그 자리를 가리고 맺혀서 그때의 뒤뜰을 찾는 내 눈에 들어온다. 외할머니가 이쑤시개로 썼던 탱자나무의 가시 덤불은 아직 바뀐 집 뒤편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덤불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부엌 문을 열고 하얀 머리를 쪽 진 그녀가 나의 이름을 성하게 부를 것 같았다.
나는 외할머니 몰래 비탈길을 올라 동네 개가 핥던 젖은 솔방울을 뺏어 냄새를 맡고 소시지처럼 깨물고 혀로 맛을 보다 산 밑의 천주교 성당 마리아 상 발아래에서 낮잠에 들었다. 그러니까 옛날에. 아주 옛날에 말이다.
트럭 탄 사내가 되어 다시 돌아오고 싶었는데 네가 없는 그 모든 일이 슬퍼 보였다. 땅거미가 지는 산 밑의 마을을 내려와 급히 버스를 탔다. 나는 어쩌면 아직도 그곳에서 어떤 먼 길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트럭을 탄 사내가 되어
네가 살던 마을로 갔다
네가 살던 집 마루에 앉아
거기 왠지 네가 했을 것 같은 기둥에 새겨진 낙서를 만져보고
네가 거기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했을
언 수도꼭지의 물을 틀어보기도 했다
트럭 탄 사내가 되어
네가 편지를 써 보냈을 마을 우체국 앞을 서성이기도 하고
네가 호기심에 기도를 올렸을 천주교 성당 마리아 앞에 서 보기도 했다
트럭 탄 사내가 되어
시골역 앞 국밥집에서 배를 채우고
새까매진 약국 하나를 지나쳐
왠지 네가 올라갔을 것 같은 마을 뒷산의 자그마한 비탈을 내려오는 길이었다
마을에 조용히 울리어 퍼지는 장작 타는 냄새가
이제 없을 너를 닮았단 생각이 드는 겨울이었다
2018.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