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훈련사님은 개를 몇 마리나 키우세요?"]
"훈련사님은 개를 몇 마리나 키우세요?"
이 질문에 "저요? 한마리요!" 라고 답하면, "엥?"하는 의외라는 반응은 이제는 제법 나에게 익숙하다. 이 질문들이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이해가 아예 안가는 것도 아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네셔널지오그래픽에 '도그 위스퍼러' 프로그램에 나오는 훈련사 '시저밀란' 이 열마리 넘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이 나 또한 강력히 머릿속에 남았으니 말이다. 훈련사라면, 개를 잘 교육 시킬테니까 여러마리도 문제 없을 것이고, 여러마리를 키울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가끔 나의 직업이 훈련사라서 개를 한 마리만 키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인연이 된다면 둘째도 생각중이지만, 정말 둘째까지가 마지노선이다.
그 이유는 이 직업을 하면서 책임감의 무게를 알았기 때문이다. 보호자에 따라 개들이 얼마나 많이 바뀌는 것인지 알아갈수록, 그 무게는 점점 크게 느껴진다. 그냥 좀 덜짖게 하고 싶어서 교육을 신청 했다가도, 교육의 마무리엔 자신의 위치의 무게를 깨닫는 분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자신이 책임질 대상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은 때론 무거워지는 일이다. 귀여운 아이들이 나오는 '슈퍼맨이 돌아왔다' 스페셜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아기를 키우고 싶다 생각 했다가도, '금쪽 같은 내새끼' 의 오은영 박사님의 말들을 듣고 무게감이 안 생기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세상에 모든 것은 하이라이트만 보면 마냥 좋은 일만 있을 것 같고, 쉬워보이는 것이다. 나 또한 태어나자마자 "응애" 하면서 훈련사가 바로 된 것도 아니었고 개를 좋아하던 꼬마 아이였다. 지금은 개를 아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엇비슷해졌지만, 개를 좋아하는 것이 더 크던 시절엔 무거움을 모르고 있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수 많은 개들을 보는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국내에 처음으로 수입된 견종들도 직접 찾아가서 많이 보았다. 그런 멋지고 귀여운 개들을 보고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 마음들은 어느새 개를 알아갈수록 자연스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개를 입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는 굳이 어깨에 개를 들쳐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느끼던 무게감을 직접 내 어깨에 들쳐매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내가 군대 전역을 앞둔 겨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외박, 휴가마다 훈련사 선배들을 만나러 다니며 훈련사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빡빡머리 군인이 휴가에서 술은 안 마시고 훈련사들을 만나러 다닌다니, 다들 기특하게 봐주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조금씩 훈련 철학과 방법들이 달랐지만, 하나 같은 것이 있다면 꼭 자기 개를 입양해서 키워보라는 권유였다. 자기 개를 키우고 함께 하면서 얻는 배움이 크다는 것이었다. 입양이 덜컥 겁이 났던 내게 하나같은 주변의 권유는 '그런가?'라는 생각이 조금씩 밀려들와 입양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특히 주변의 훈련사 선배형이 강아지 한마리를 입양하면 어떻겠냐며 소개를 해주었다. 아는 분네 보더콜리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니 팬더곰 같이 귀여웠지만, 확 끌리진 않았다. 간단히 소개만 받았고 아직 전역을 앞둬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강아지와 전역을 막 앞둬서 사회에 막 나온 내가 별 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멀리 천천히 알아보고 입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절했던 마음은 마지막 휴가날 핸드폰을 키고 뒤바뀌었다. 군인에게 마지막 휴가는 사실상 전역이다. 대략 보름 정도 되는 휴가가 주어지는데, 휴가 복귀해서 밤에 전역 파티를 하고 다음 날 부대원들하고 인사하면서 헤어지면 전역이니까 말이다. 부대 행정반에 맡겨두었던 핸드폰을 받고 부대에 나와서 핸드폰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켰다. 무슨 운명이라도 있었던걸까. 키고 5분이나 됐을까. 기가막힌 타이밍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선배형이 소개해줬던 보더콜리 보호자였다. "잘 지내죠? 혹시 전역 했어요? 다름이 아니라..."
그 분이 이어나간 이야기는 전역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 먹먹한 마음으로 나를 바꿔놓았다. 이제 막 태어난 강아지의 모견이 차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됐다는 이야기었다. 아마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치료와 다리 마비로 인해 더 이상 제대로 모견이 강아지들 케어를 할 수 없어서 인공포육처럼 키우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각자 주인들을 만났으면 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처음 얘기를 듣고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보다 분노였다. 개들의 사고는 대부분 보호자의 부주의이기 때문에. 내 개도 아니긴 하지만, 소개를 받은 것 자체로 나는 그 강아지와 뭔가 이어져 있었다. 생각해보고 연락을 드리겠다고 마무리한 통화에서 나는 보름의 휴가 기간 내내 강아지에 대한 생각으로 보냈다. 동기들은 말년휴가를 나와 날아(?)다니는데 어디 한군데가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직접 강아지를 본 것도 아니고, 소개야 거절 할 수도 있는 것이며, 좀 더 생각해보고 싶었던 마음이었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은 자꾸 흔들렸다. 휴가 내내 고민했다. 오랫동안 개를 알아가며 책임감의 무거움을 알았던 나는 그 무게를 자진해서 들기로 마음먹었다.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한 것이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렇게 생각이 드는 건 인연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아지 이름은 꾸롱이. 꾸준히 롱런하라는 뜻으로 지었다. 꾸롱이를 입양하는 그 날은 아직도 선명하다. 유난히도 눈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왔다. 눈이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입양하면 오래 산다는 소문이 사실처럼 믿어지는 순간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꾸롱이를 동생과 안고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추운 날씨와 그 조그만한 몸의 온기가 대비 됐을 때의 미묘한 감정. 내 신발보다 작은 강아지가 주는 온기는 생각보다 컸다. 꾸롱이를 책임지고 잘 키울테니까 걱정말라고 가족들에게 호언 장담 했지만, 이제와 고백컨데 사실 많이 두려웠다. 군대에서 아끼고 모아 내 통장엔 이백만원 남짓한 돈. 나의 2년이 쌓인 돈이라 꽤 크다고 느껴졌던 그 돈이 생명을 지켜내기엔 초라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였을까 싶다. 그걸 알고도 무엇이 나를 무모하고도 용감하게 만들었을지 정확히 콕찦어서 알 순 없지만, 꾸롱이는 그렇게 내 품에 안겼다. 꾸롱이를 데려오고 10시간이 넘는 일을 하는 애견 훈련소에서 일을 했다. 정말 잘 키우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정말 신경 써서 시켰다. 단순히 여러가지 개인기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실내에서 안정되게 지낼 수 있는 교육의 계획을 짜서 꾸준히 시켰다. 물론, 그렇게 시킨다고 보더콜리 강아지는 집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똑똑하다고 키웠다가 가장 많이 유기견이 되는 이유 중 하나다. 똑똑하다고 키우기 쉽다는 생각은 절대 금물. 보더콜리는 24개월때까지 개가 아니라 공룡이라는 썰이 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높은 진열대에 있는 화분을 꺼내 집을 흙운동장으로 만들어 놓기. 다리가 4개 달린 나무 의자 한쪽을 물어 뜯어 다리를 3개로 만들어 놓기. 베란다에 있는 낙지 물고 도망 다니기. 화장실에서 배수구 뚜껑 가지고 질주하기. 강아지 때 교육은 이런 걸 조금은 줄여줄지 몰라도 없앨 순 없다. 당연하다. 강아지니까 그렇다. 덕분에(?)나는 퍼피 트레이닝으로 강아지의 우당탕탕을 완전히 막으려는 보호자님들께 꾸롱이의 사례를 들며 이렇게 얘기 한다. "훈련사가 키우는 강아지인데도 그랬어요."
꾸롱이의 첫 산책들은 쉽지 않았다. 겁이 몹시 많은 성격이어서 처음 보는 것들을 의심하고 또 의심 했다. 예를 들어 산책 길에 못보던 오토바이 한대가 세워져 있으면 "뭐야.. 왜 저런게 저기있어.." 하는 표정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처음 산책에 나와 기차 소리를 듣고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나무 뒤에 숨어서 오들 오들떨었다. 꾸롱이가 두려워하는 소리를 기록하고, 꾸롱이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어느정도 거리에서 두려워하는지 기록했다. 두려워하는 소리는 잘 녹음해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교육했고, 그나마 괜찮아하는 거리에서부터 점차 적응을 시켜주었다. 어릴 때부터 집중 했던건 도시에서 나와 편안히 지낼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 기찻길 옆을 나와 걸을 수 있다. 100일이 되던 무렵에는 예상치 못한 행동이 시작 됐다. 보더콜리는 양몰이 견종이라 몰이 본능이 발달 되어 있는 개들이 많다. 시각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 오토바이, 킥보드 같은 것들을 보고 모는 자세를 취했다가 순간 달려든다. 이 모든 것들을 보면 눈의 동공 모양 자체가 바뀌던 꾸롱이를 붙잡고 나를 선택하는 교육을 꾸준히 했다. 지금의 꾸롱이에게 자동차, 오토바이, 킥보드는 관심 조차 없는 대상이 되었다. 짧은 다리로 겨우 겨우 나를 따라붙던 꾸롱이는 어느새 나를 가뿐히 따라 잡는 롱다리가 되었다. 우당탕탕은 가끔씩 있었지만 순탄했던 어느 날, 아직도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실내에서 잘 지내기 위해 켄넬 교육을 신경써서 해왔다. 그 무렵쯤 꾸롱이는 문을 열어두어도 켄넬에 들어가서 스스로 쉬고 자는 것이 일상화 되고 있었다. 특히 불을 끄면 켄넬로 들어가서 자곤 했다. 저녁이었다.
엄마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이상하다며 등 좀 두드려 달라고 해서 저녁을 잘 못 드셨나해서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엄마는 갑자기 숨을 못쉬겠다며 119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아빠는 일을 하는 중이셨고, 동생도 없고, 나와 엄마, 꾸롱이만 있던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모든 상황에 보호자가 된 것 같은 압박감이 몰려왔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다 잡았다. 119를 눌렀고 구급대원 분들이 오셨다. 평소 같았으면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던 꾸롱이가 내 옆에서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바로 엄마와 함께 응급실로 넘어가셨다. 여러 검사에서 명확한 원인을 찾기는 힘들었고, 그 근래에 여러 일로 스트레스가 많던 엄마께서는 일시적으로 몸이 반응 하신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잠시 후에 서서히 회복 하셨고, 불행 중 다행이라며 애써 웃는 얼굴로 엄마가 다시 들어오셨다. 뒤이어 오신 아빠와 함께 세 가족은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평소와 다른 꾸롱이가 보였다. 꾸롱이가 가장 장난 많이 치던 엄마였다. 놀고 싶으면 엄마 수면 바지 자랏을 물고는 갸르릉 소리를 내던 꾸롱이였는데 차분한 모습으로 엄마를 반겨주었다. 겁을 먹은 모습이 아닌 차분해진 모습. 그 날 꾸롱이는 차분하게 엄마 옆에 붙어서 보냈다. 그 이후로도 엄마를 감시 보호하듯 차분하게 따라 다녔고 엄마 옆에 꼭 붙어 잤다. 평소에 무작정 하던 장난도 하지 않고 말이다. 1주일쯤 되던 날 엄마는 꾸롱이에게 말했다. "꾸롱아, 엄마 괜찮으니까 켄넬 들어가서 자도 돼." 꾸롱이는 그 날 다시 켄넬로 들어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점차 개구쟁이로 돌아왔다.
이 말을 하면 어떤 훈련사도, 보호자도 쉽게 믿을 수 없을만한 이야기란 걸 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리 철부지 같던 강아지가 상황을 보고 차분해졌다는 것을 훈련사로서 정확한 이론으로 풀어내긴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엄마가, 우리 가족이 느낀것은. 꾸롱이와 말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꾸롱이는 그 이후로 더욱 우리 가족에게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가끔 술 한잔 하고 들어오시는 날이면 꾸롱이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씀 하시는 무뚝뚝한 아빠, 회사 다녀오는 길이면 멀리서부터 꾸롱이를 볼 생각에 신나서 들어오는 엄마, 어딘가 놀러갔다 오는 날이면 꾸롱이 간식 선물 사오는 여동생. 훈련사가 키우면 대단히 다를 것 같지만 다른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반려가족이다. 어느덧 8살이 된 꾸롱이. 이제는 제법 보이는 히끗한 털이 다음 날엔 사라지라고 이뤄지지 않을 기도를 하며 잠이든다. 훈련사님을 처음 가르쳐준 스승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꾸롱이를 말할 것이다. 얼마나 개들이 가족으로서 소중한지 더욱 알았기 때문에. 반려견 훈련사란 그저 그 가정에 가서 기계 고치듯 고치는게 아니라, 그 가족들이 잘 어우러지도록 돕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단순한 훈련 이외에 교감한다는 것을 더더욱 깨달았기 때문에. 꾸롱이가 없었다면 나는 그 길을 돌고 돌아 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존재 자체로 고맙다. 꾸롱아. 꾸준히 롱런 해다오.
훈련사인 나는 꾸롱이 한마리만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