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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화 Feb 12. 2024

독백, 나의 회고록. 05.

그 여자와 그 남자.


햇살이 따사로워 보였다. 고민을 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케케묵은 감정을 털어내야 할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갑작스레 쏟아진 밝은 빛에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많이 시렸다. 반쯤 찡그리며 천천히 눈이 빛에 적응되길 기다렸다.


아직 갈 곳을 정하지 않아 발 끝이 망설여졌다.

오늘은 유독 햇살이 좋으니까, 근처의 카페로 가려다가 조금 더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다시 기억 속에 잠겼다.

물소리를 따라 흘러가는 기억들 중 반짝 빛나는 조각이 보였다. 조심히 손을 뻗어 건져낸 그 조각을 햇살에 비추어보았다.

물기를 머금은 그 조각은 더욱 반짝이며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가까이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참 별거 없는 수수하고도 심심한 내 인생에 제법 격렬한 인상을 남겨준, 도쿄의 그녀와 오키나와의 그를 추억해보고자 한다.




그 해 봄, 도쿄로 여행을 갔다. 원래라면 남자친구와 함께할 여행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이 아닌 이별을 먼저 맞이했고 그렇게 나는 혼자 도쿄로 떠났다.


혼자 하는 도쿄여행은 그래도 나름 즐거웠다. 중간중간 문뜩 고개를 드는 그를 두더지게임하듯 뿅망치로 두드려 넣으며 여행을 즐겼다.


이 날은 내가 도쿄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친해지게 된 언니와 동생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갑게 인사했다.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었고, 카페를 2군데나 가면서 근황을 나누고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그들과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고, 나는 도쿄타워를 보러 어딘가로 향했다.

당시 재미있게 보던 일본드라마가 있었는데, 도쿄에 온 김에 거기에 나온 로케지를 가보고 싶었다.

도쿄의 그녀를 만난 곳

저녁식사 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들만의 평온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롭고 어쩐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이곳의 분위기는 공기를 타고 잔잔하게 소곤소곤 흘렀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음이 벅차올랐던 나는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혼자 왔지만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서 셀카도 열심히 찍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와 비슷한 아담한 체구의 숏컷이 잘 어울리는, 작은 얼굴에 큰 눈을 가진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주친 눈에 당황한 나는 어버버 거리며 괜찮다고 했고 그런 내 모습에 그녀까지 덩달아 수줍어진 듯했지만 곧 쾌활하게 답했다.


‘열심히 사진 찍는 모습이 저기서도 보여서 찍어드리고 싶었어요.’


그 말에 나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나 그렇게 열렬하게 찍고 있었구나.

그녀는 그녀가 온 곳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오늘 요가수업이 있어서 저쪽에서 요가를 하던 중이었어요.'


수업이 끝나고 돌아보는데 내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몇 분을 그렇게 서서 그녀와 시시콜콜 대화를 나눴다. 꽤나 즐거운 대화가 오갔다.


‘제가 저녁을 못 먹어서 그런데 괜찮으면 우리 저기 카페 가서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권유에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대화는 장소를 옮겨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음식을 시켰고, 이미 저녁을 먹었던 나는 음료를 시켰다.


그녀는 무역 쪽 일을 해서 외국인과 만나는 일이 많다고 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라며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그렇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구나, 그녀는 정말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는 꽤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카페를 나오니 사람으로 북적이던 그곳은 어느새 한적하고 어둑해져 있었다. 역을 향해 걸어가는 길까지 우리의 대화는 끊기질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팔짱을 끼며 아쉬운 듯, 그래도 오늘 말을 걸어보길 정말 잘했다고 했다.

역에서 우리는 오랜 친구와 헤어지듯 아쉬운 작별을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물론 다시 만나진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 아마 그녀에게도 그날의 만남은 잊을 수 없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해 가을, 나는 오키나와 여행을 가게 되었다. 급작스럽게 정해진 퇴사 후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4박 5일의 일정이었는데 나는 먼저 가있고 이틀 뒤에 친한 언니가 오기로 했다.


그 당시 지인이 오키나와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잠깐 얼굴이나 보기로 했었다.

혼자 오키나와에 도착한 날, 시간이 맞아 지인과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 약속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던 나는 근처에 갈 만한 곳을 찾아보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해변을 가려고 길을 나섰다.

해변에서 노을이 지는 모습을 봐야겠다, 고 생각했다.


폰으로 구글맵을 보며 길을 건너던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혹시 역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세요?’


휴대폰에 향해있던 눈길을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오키나와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나를 보며 서있었다.


어색한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나는 관광객이라 지리를 잘 모른다고 답했다.

나의 말에 그는 살짝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내가 일본인인 줄 알았다며, 일본어를 잘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전에 도쿄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한 적이 있다, 고 답했다.

흥미진진하단 듯 그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그는 자신은 후쿠오카에 살고 있으며, 출장 때문에 오키나와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 마침 업무가 끝나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어디 가는 길이였어요?’


그는 나에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이 근처에 해변이 있다고 해서 거기를 가는 중이었다고 답했다.

그는 이 주변에 해변이 있냐며 놀란 듯 물었고 나는 마침 우리 사이에 있던 표지판을 가리키며 답했다.

표지판은 해변으로 가는 방향과 거리를 알려주고 있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그는 정말 가보고 싶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어차피 나는 해변으로 가던 길이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해변으로 함께 걸어가면서 그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관광지스러운 느낌이 풍기는 곳이 보이면, 나를 멈춰 세운 후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는 나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카메라맨을 자청하며 그는 내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다.


그는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꽤나 잘 찍어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사진을 잘 찍는다고 그를 칭찬했고 그는 내가 예뻐서 잘 나오는 거라고 해주었다.


그와의 동행은 꽤나 즐거웠다. 우연한 기회로 만난 것치곤 이상하게 말이 잘 통했고 대화가 즐거웠다. 그는 세심했고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


해변을 가려면 길을 한 번 더 건너야 했는데, 신호를 기다리며 눈앞에 가득 펼쳐진, 노을 진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오키나와의 하늘을 담는 내 모습을 보며 그는 다시금 나를 찍어주었고, 조심스럽게 자신과 같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기분이 한껏 좋았던 나는 기꺼이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매번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던 그가 이 사진만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찍었다.

오키나와의 그와 함께 본 해변


길을 건너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해변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사람이 많지 않아 해변은 잔잔한 파도소리만이 웅웅 맴돌고 있었다.

조잘조잘 떠들며 걸어왔던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잔잔하게 물들고 있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가 가까워지는 그 순간을 눈에 담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는 조심스럽게 나의 연애의 안녕을 물었다. 세상과 동 떨어진 듯 이상하게 편한 그 분위기에 취한 나는 그에게 내가 어떤 이별을 했는지 덤덤하게 꺼내 들려주었다. 아직 이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그때만큼은 꽤나 먼 추억처럼 느껴졌다.

흡사 고해성사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그는 이야기가 끝나자, 멍하니 오키나와의 바다를 바라보던 나에게 말했다.


‘나라면 너를 힘들게 하지 않을 텐데.’


그 말과 함께 난간을 잡고 있던 내 손 위로 그의 손이 포개졌다.

갑작스럽게 전해진 온기에 번뜩 멀어졌던 나의 세상이 돌아왔다. 멀리서 울리듯 들리던 소리들이 생생하게 나의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해는 어느덧 그 모습을 바닷속으로 감추었다. 나는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내렸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이제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못내 아쉬운 눈빛을 하며 같이 돌아가자고 했다.

역으로 가는 길에 그는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어필했다. 조금 조급해 보였던 것도 같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으려고 했고 나는 미꾸라지처럼 그의 손을 빠져나왔다.


나는 조금 부담스럽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럼에도 자신에 대해 알아달라고 했다. 알아가 달라고 했다.

그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 몇 시간 만에 그는 나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너는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자신은 그 사람처럼 하지 않을 거라고.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올곧게 표현할 수 있다니,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 사람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사랑을 느끼기에 나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언젠가 후쿠오카에 놀러 와줘, 그는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와도 결국 다시 만나진 못 했다. 하지만 찰나의 연으로 그토록 후덥지근한 열기와 짭짤했던 바다내음이 가득 담겼던 오키나와의 바다를 함께 걸었던 이를 우리는 서로 기억하겠지.



나는 도쿄의 그녀가, 오키나와의 그가 아직도 가끔 생각나고 종종 그립고 자주 고맙다.


나에게 이렇게 빛나고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기억 조각을 남겨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도쿄의 그녀 M. 그리고 오키나와의 그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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