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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화 Apr 08. 2024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비 온 뒤 땅이 굳듯이.


이 날은 오후에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4시 전시회 예약을 해두어서 3시쯤에는 공방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1시간 일찍 공방에 도착하려고 했다. 그런데 밖을 나오니 햇살이 너무 따사로워서. 날씨가 너무 포근해서.


걷고 싶었다.



조금 여유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어 그냥 집에서 공방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 골목골목 봄의 손길이 닿아있는 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부풀어 터질 듯한, 봄향기를 가득 담고 있는 꽃봉오리들이 보였다. 참 아름다웠다.



물레를 돌릴 시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어, 참 다행이야.


 

그렇게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공방에 도착했다. 사실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으로 되어있는데 선생님께 여쭤보니 그 시간에 와서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셔서 (다만, 수업진행은 어렵고 혼자 연습해야 하긴 했다.) 일찍 온 것도 있었다. 원래는 1시부터 거의 4시까지 3시간 꽉꽉 채워서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았으니까, 평소처럼 꽉꽉 안 채우고 여유롭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항상 같은 시간에 마주치는 수강생분과 인사한 후 오늘은 항상 앉는 가운데 자리가 아닌 왼쪽 제일 끝자리 물레에 앉았다. 가운데 물레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어쩔 수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낯선 물레라 조금 걱정되긴 했다. 역시나 발판이 너무 뻑뻑해서 속도 컨트롤이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하는 수밖에 없어.



지난 수업 때 만든 기물이 굽깎기를 하기에는 아직 촉촉한 상태여서 한켠에 두고 물레를 돌릴 준비를 했다.

오늘은 긴 원통을 만들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집중해서 중심잡기를 시작했다. 문제없이 점점 중심이 잡혀가길래 이제는 조금 잘 되는 건가 하기 무섭게 속도조절을 잘 못한 건지 중간에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소지가 반토막이 날 뻔했다.



놀란 마음으로 물레를 멈췄다. 다행히 완전 끊긴 게 아니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조심조심 중심을 잡아갔다.

올려주고 내려주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그렇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이상하게 바닥이 평평하게 잘 안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따라 물레속도가 원하는 대로 조절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속도감을 못 찾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자꾸 어긋나.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해져 갔다.



내가 생각한, 내가 원했던 원통컵 모양이 안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연습하는 느낌으로 다른 모양을 만들었다. 망해도 상관없을, 여러 가지 모양을 내는 방법을 연습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첫 번째 시도도, 두 번째 시도도 마지막 세 번째 시도도.


내가 생각한 대로 원통모양이 나오지 않아 그냥 손 가는 대로, 목적 없이 그저 뿌연 안갯속을 걸어가듯 되는대로 만들어보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는데.

오른쪽부터 왼쪽 순서. 모양은 나왔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진 않았다.

겉보기엔 그럴싸해 보이긴 했다. 두 번째 만든 항이리모양 기물은 사실 원통컵을 길게 뽑아보다가 원하는 모양이 안 나오길래 연습 삼아 해 본 거였다. 길게 뽑았는데 모양을 만들어가며 누르다 보니 겉은 멀쩡해 보였지만 안이, 특히 바닥 부분에 금이 간 듯 갈라져있었다. 아쉬움 없이 두 번째 기물은 반죽통에 버렸다.



이대로 굽깎기를 하기엔 아쉬워서 다시 물레성형을 했다. 어떻게든 긴 원통을 해보고 싶었다.

두 번째 물레성형은 첫 번째보다 더 감이 안 잡혔다. 속도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기벽이 자꾸 어긋나는 게 느껴졌고 뒤틀려지는 게 보였다.

결국 첫 시도는 그렇게 기벽이 무너져내려 끝나버렸다.

살짝 마음이 꺾였지만 다시 다 잡았다. 다음엔 다시 속도를 잘 조절해 보자.


두 번째 시도는 그래도 속도감을 찾아가며 기벽을 끌어올렸는데 이번에는 손가락 힘조절을 제대로 못했다.

기벽이 울퉁불퉁 올라왔고 결국 한쪽이 치우치게 올라오게 되었다.


잘라내야겠다.


전에 선생님이 창칼로 기물 윗부분 잘라내는 방법을 알려주셨어서 이번에 시도해 보았다.

선생님이랑 같이 할 때는 잘 되었는데 막상 혼자 하니 엉망진창으로 깎였다. 속도가 너무 빨랐나? 다시 한번 신중하게 창칼로 윗부분을 도려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울퉁불퉁.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결국 두 번째 시도도 살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해버렸다.



마음이 다시 한번 꺾였다.

 


아직 한번 더 해볼 수 있어.


이번엔 조금 마음을 비우고 했다. 

긴 원통이 아니어도 되니 그냥 다시 한번 감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겨우 성공시킨 기물들.

마지막 시도는 그래도 컵모양으로 만들어냈다. 원했던 긴 원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시도까지 실패했으면 정말 마음이 완전히 꺾였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이렇게라도 만들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레성형은 여기까지로 하고 남은 시간은 굽깎기를 했다.


아직 조금 덜 마른 거 같긴 했는데, 우선 항상 첫 시도는 실패했으니까 망해도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은 기물을 먼저 손에 집었다.



확실히 아직 덜 말라여서일까? 굽깎기도 쉽지가 않았다. 자꾸 울퉁불퉁 깎기고 깎여나간 부분이 굽칼에 달라붙었다. 나름 애써보았지만 그렇게 결국 구멍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괜찮아. 매번 첫 시도는 그랬는 걸.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 번째 기물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히 해보자.

그러나 두 번째 기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삐질삐질 굽깎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오신 선생님이 아직 굽깎기를 하기엔 기물이 덜 말라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이럴 땐 도구를 이용해 열을 조금 쐐서 말리면서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결국 회생이 불가할 정도로 바닥이 뒤틀려 버렸다. 

그렇게 두 번째 기물도 구멍엔딩으로 끝났다.



마음이 착잡했다.



남은 기물들은 다음 수업때 하기로 했다. 오늘은 뭘 해도 다 망할 거 같았으니까.



'선생님. 오늘은 뭔가 계속 잘 안 풀리는 것 같아요.'


'가끔, 그런 날이 있어요. 이상하게 잘 안 되는 날. 그런 날은 그냥 내려놓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오래 붙잡는 것보단.'



대신 이상하게 잘 풀리는 날도 있으니까요!



선생님의 밝고 긍정적인 힘은 항상 나에게 기운을 주신다. 그래,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었던 거야.


잘 되는 날이 있으면 이상하게 잘 안 되는 날도 있는 거야.


그런 나날들 속에서 일희일비하며 살아가는 거야.



명수옹님이 그랬다.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그렇게 더 도전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했다. 아쉬움이 물론 아주 많이 남기는 했다. 대신 다음 수업 때 더 열심히 하면 될 거야. 그렇게 다짐했다.



'아! 참! 만드신 거 나왔어요.'



자리 정리가 끝난 나를 선생님이 부르셨다.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가니 테이블 위에 내가 만든 기물들이 각각의 형태를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다섯 개의 완성작.

왼쪽 편에 있는 색색의 완성작은 저번 수업 때 열심히 사포질 하고 유약을 고른 것들이었고 오른쪽 2개의 완성작은 지난번 채색을 해두었던 것이어서 투명유로 시유해서 소성해주셨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굽, 그렇니까 가장 바닥 아랫부분은 다이아몬드사포로 문질러 다듬어주어야 한다.


잔의 아랫부분은 유약을 닦아두는데, 유약을 바른 채로 가마에 굽게 되면 달라붙게 되기 때문이다. 

유약을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거친 느낌인데 그대로 책상에 두고 사용하면 긁혀서 흠집이 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다이아몬드 사포로 바닥을 다듬어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열심히 밑면을 다듬고 이 중에서 또 선택을 해야 했는데, 가마소성비는 별도의 금액이 추가로 발생한다.

그래서 다 완성되고 나면 무게를 측정해 계산하여 추가결제를 해야 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완성작은 버리면 됐다.

이별 / 선택

사실 마음 같아선 다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왼쪽에 있는 완성작은 유약이 말려서 겉면에 기포같이 오돌토돌 올라와있었다. (선생님이 이렇게 유약이 표면에 잘 밀착되지 않고 올라온 걸 말렸다고 한다고 하셨다.)

조금 못나게 기포가 올라와있어서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결국 2개는 폐기하기로 하고 나머지 3개를 가져가기로 했다.


다만 이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이미 공방에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보니 이거까지 할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와서 하겠다고 한 후 급하게 공방을 나왔다.



이번 수업은 어쩐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물레성형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굽깎기는 성공시킨 게 없었다.

전시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볍지가 않았다. 



그래도.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야. 언제나 맑을 순 없는 거야.

비 온 뒤 땅이 굳듯이, 이런 경험을 해서 더욱 단단해질 수 있는 거야.



그렇다. 나는 그저 이렇게 계속 물레를 돌리면 된다.

이 모든 날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그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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