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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화 Feb 08. 2024

독백, 나의 회고록. 01.

태초의 기억.

친구의 추천으로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란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았다.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은 뭐야?'

라는 질문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질문을 마치 나에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답하고 싶다.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니 머릿속으로 수많은 뭉게구름이 떠다녔다.

그중 가장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다가온 구름조각을 나는 태초의 기억으로 하고자 한다.



나의 태초의 기억은 어둡던 겨울 어느 날이다.

그날은 온 가족이 다 함께 영화관을 갔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는 친척끼리 가까이 살았고 또래의 사촌도 있었기 때문에 꽤나 많은 인원이 함께 모여 들뜬 마음으로 어두운 저녁길을 걸어갔다. 길은 어두웠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밝았다.


우리가 함께 본 영화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어렸던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장면들에 감탄하기도, 놀라기도 하며 꽤나 심장을 졸여가며 영화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하얀 부엉이를 키우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영화가 다 끝나고도 성난 황소처럼 열렬하게 들떠버린 마음은 좀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와 사촌애와 동생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런 우리를 보며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촛불이 일렁이듯 따뜻함으로 은은하게 물들어있던 영화관을 나오자 더욱 짙어진 어둠이 세상 가득 내려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짙은 어둠 사이로 빛나듯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이다.'

눈앞에 펼쳐진 하얗고도 하얀 풍경에 나는 기쁨을 가득 담아 소리 질렀던 것 같다. 눈을 좋아했던 나는 바로 영화관 밖으로 뛰어나가 그 짙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어 눈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펑펑 눈이 내렸다. 거리에는 이미 꽤나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누군가 하얀 솜으로 거리를 장식한 것 같았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눈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우리를 위한 어른들의 배려였다.


우리는 오손도손 길을 걸으며 눈을 던지기도 했다가 눈을 굴리기도 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뭉쳤던 눈은 조금씩 조금씩 덩치를 불려 갔고 나중에는 어른의 손을 빌려 같이 굴려야 했다. 꽤나 열심히 굴렸는데 집 앞에 눈사람을 쌓아놓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가파르게 경사진 언덕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힘을 내보았지만 결국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비슷했던, 함께 갈 수 없는 눈사람을 보며 많이 속상했다. 혼자 두고 가서 미안했다.


외숙모는 행여 우리가 미끄러질까 너무 멀어지면 달려와주었고, 눈을 만져 차가워진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렇게 차가웠던 손을 녹여가며 외숙모와 하얀 눈길을 폭폭 걸었다. 손으로 이어진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러다가도 아무도 밟지 않아 깨끗한 하얀 캔버스 같은 곳을 발견하면 잡은 손을 놓고 저 멀리 뛰어갔다. 내가 지나온 길에 검은 선이 남았다. 마치 그림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차디찬 밤공기에 코 끝이 시렸고, 얼음조각 같은 눈을 만진 손은 빨갛게 얼어있었다.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심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던 것 같다. 이까짓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리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있었지만 펑펑 내리는 새하얀 눈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혼자 너무 멀어져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 때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전구처럼 빛나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나는 그 빛이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점점 주변을 밝히는 포근한 빛에 무서움이 도망가는 것 같았다.


하염없이 내린 눈에 우리의 옷은 점점 젖어들어갔고 차디찬 바람은 우리 몸을 꽁꽁 얼게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따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는 많이 웃었다.


그다음 날 감기에 걸렸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걸렸어도 나쁘진 않았을 것 같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내가 왜 그 질문에 답하고 싶었는지,

왜 이 기억이 나에게 가장 빠른 속도로 다가와주었는지, 어렴풋 알 것 같다.



나는 이 날을 가장 먼저 기록하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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