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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누 Nov 09. 2019

정말 건강하게만 자라면 되나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feat. 애기 아빠)

조카의 돌잔치에 갔다. "아버님께서 덕담 한 마디 해주시죠."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주인공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덕담의 끝은, "건강하게만 자라줘"였다. 대부분의 돌잔치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절대 빠지면 안되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될까? 건강하게'만!'...


왜 돌자치 덕담에서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아빠 호강 좀 시켜다오, 공부 좀 잘해서 아빠 기 좀 살려다오, 좋은 곳에 취직해서 걱정 좀 끼치지 마라, 나쁜 친구 사귀지 말고 바르게 자라다오" 등의 말은 하지 않는 걸까? 사실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게 많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게 미덕이라서? 남들 보기에 이상하니까? 아이에게 부담이 되니까? 우리 아버지들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아이의 건강만 중요한 것일까?


조카가 처음 걸음마를 뗐을 때, 우리 아이들의 걸음마가 생각났다. 첫째 아이가 첫 걸음을 뗐을 때, 너무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아이가 처음 뒤집었을 때, 기었을 때, 말을 했을 때, 글자를 읽었을 때, 썼을 때, 더하기를 했을 때, 빼기를 했을 때, 유치원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 갈 때, 그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감회가 새로웠고, 감격적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의 감격을 비할 바가 아니였다.

첫째가 첫 걸음을 내 딛는 순간 내가 느낀 감동은, 닐 암스트롱이 1969년 달에 첫발을 내디디는 모습을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TV를 시청하며 느낀 감동? 수 년, 수십 년 고생하여 달나라에 갈 수 있는 유인우주선을 만들어 낸 개발자가 느낀 감동? 그 뭉클함 이상이지 않을까 한다. 비록 "한 인간의 작은 한 걸음이지만, 그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도약"이라 불릴 만큼...그 만큼 첫째 아이의 '첫' 걸음은 내게 중요했다.


첫째가 태어나자 간호사가 나를 급하게 찾았다. 뛰어들어간 분만실에서 간호사는 바쁘게, "하나, 둘, 셋, 넷...손가락 열개, 하나, 둘, 셋, 넷...발가락 열개, 정상이구요, 심장소리 이상 없구요. 00시 00분에 정상분만하였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아내가 10개월 동안 뱃 속에서 키우고, 수 시간을(사실 아내는 수 분 정도였지만...) 고통 속에 진통하여 아이를 낳은 그 순간, 의사와 간호사,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이냐!"라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도 자주 듣는 대사가, "정상인가요? 건강한가요?"이고, 우리가 수시로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방문하는 순간에도 의사선생님은, "심장 잘 뛰고 있고요, 손, 발 보이죠? 정상이에요.", "잘 놀고 있죠? (혹은 자고 있네요), 건강합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태어나서도 매월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예방접종을 맞으며, 아이가 "정상"인지, "건강"하게 자라도록 확인하고, 관리한다. 6~7살이던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그 때쯤은 지나야, 아이가 이제서야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여자의 뱃 속에 아이가 잉태하는 순간부터, 태어나는 순간, 아이가 7세가 되는 순간까지 항상 "정상"과 "건강함"에 대해 듣고,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기대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8살, 7살이 되었다. 요즘 내게 관심사는 "건강하냐?"가 아니다. "친구랑 잘 지내는지? 너무 살이 찌는 건 아닌지? 까불까불 거리다가 큰 사고라도 나지 않을지? 아이의 인성을 어떻게 키워나갈지? 어떻게 좋은 부모가 될지? 아이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이 될지?" 등이다. (우리 아이의 학업성취도가 다른 아이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지? 아이에게 뭘 더 시켜야 할 지? 등은 '현재'까지의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곧 오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7살'이 넘으면서,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제 걷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지금은 '얼마나 빨리 뛰는지,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다. 더하여 관심은 성격이고 성향이다. 아기 때는 혼을 내면 쉽게 무서워하고 자신의 행동에 변화를 주어, 부모님이 화난 상황을 벗어난다. 마구 떼를 쓰면 사탕 하나면 해결된다. 잘 한 일은 머리를 쓰다듬고 뽀뽀를 해주면 '매우 기쁨'의 단계로 들어가고, 보상이 확실해 진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를 가게 되면 달라진다. 떼를 쓰진 않지만, 삐진다. 삐지면 해결하기 위해 상당한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순간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머릿 속에 남고, 그 감정이 계속 쌓여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혼을 내도 일단 듣지 않는다. (잘 듣는다고 생각하는 건, 진짜 매를 들 정도로 심하게 혼을 냈거나, 아이가 '듣는 척'하는 상황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언성이 높아지고, 아이 마음에 상처를 줄 정도의 강도 높은 언어를 사용하여 혼을 낸다. 하지만 이렇게 혼을 냈을 때, 아이가 정말 알아듣고, 깨닫고, 앞으로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하기에 또 아이에게 불쾌한 감정은 쌓이고, 이 역시 스트레스가 된다. 칭찬을 하는 순간도 '돈'이 든다. 아이는 용돈을 바라거나, 직접적으로 장난감, 아이스크림 등 물질적인 대가를 바란다. 그럴때면 '아...지금 내가 하는 칭찬이, 칭찬이 맞는가...대놓고 용돈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용돈을 주는 것이 칭찬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아이가 생각하는 적절한 보상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아이와 갈등이 생기고, 아이의 스트레스 지수는 다시금 높이진다. 이런 높은 스트레스를 가진 초등학생을 위해, 다시 나는 주말에 여행을 가고, 놀아주고, 하지만 아이의 체력에 따라가지 못하고, 흥미가 없는 나는 제대로 놀아주지 못하고, 아이는 불만이 또 생기고, 어떻게 하면 좋은 아빠가 될까? 이런 게 아이의 성격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만약에 아이가 중,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때는 분명히 아이의 성적과 행실(담배를 핀다거나, 게임방에만 주구장창 앉아 있는다거나, 엄마를 무시하고 대든다거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대학에 가게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면, 취업은 할 수 있을지? 안되면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할지 고민이 될 것이고, 결혼을 하면 부부관계는 괜찮을지? 손자, 손녀는 몇 명을 볼지, 그 애들은 잘 키울지? 그 이후에는 내가 죽은 뒤에는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걱정을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자식들에게 갖게 되는 고민과 생각, 기대는 아이의 성장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가 절대 아니다. 그건 7세 이하의 아이에게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기대일 뿐이다. 지금 내가 관우에게 바라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다오'처럼 말이다.


오늘 기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며, 모자와 마스크를 쓴 우리 첫째 아이 또래를 봤다. (아마도 항암치료를 위해 서울로 가는 것 같았다) 아이는 엄마에게 휴대폰 게임을 시켜달라고 졸랐고, 엄마는 바로 휴대폰을 켜서 아이에게 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떼를 쓰면 내 와이프는 저렇게 해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저 아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아, 서울에 항암치료를 위해 올라가는 길이라면...건강하지 않다면...그 때도 아이들에게 "휴대폰 게임은 나쁜거야, 눈이 나빠지고, 생각을 안하게 되고, 폭력적이야. 우리가 여행을 가서 밤에 할 것이 정말 정말 없을 때만 할 수 있께 해줄꺼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정말 건강하지 않아서, 내가 기대하는 만큼 오래, 함께, 언제까지 할 수 있을 지 모르는 상황이라면...우리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도록 제재를 할까? 그 때도 장난감을 안사주고, 오락을 안 시켜주고, 사탕을 못 먹게 하고, 공부를 하라고 강요하고, 학원에 보내고, 밤에 자라고 등을 떠밀까?


나의 아이들은 건강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오늘 이 아이를 보면서, 갑작기 우리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게 된다면...나는 아마 평생 휴대폰을 갖고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휴대폰을 보면, 금요일 퇴근 길에 항상 쪼르르 달려와 안기며, "아빠 고스트헌터 해도 돼요?"라고 속삭이는 둘째가 생각날 것 같다. 내가 옛날에 쓰던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찍고, 벨소리를 들으면서 '내 휴대폰'이라며 인터넷으로 '미세미세'를 찾아보다,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둘째가 생각날 것 같다. 어느새 이미 커버려서, 중학생 형들처럼 '브롤스타즈'를 하고, 헤드폰을 목에 걸고 '멜론'을 듣는 첫째가 생각날 것 같다. 그게 뭐라고...왜 아이들한테 못하게 했을까? 어딘가 내가 없는 곳에서는 마음껏,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기도할 것 같다.


우리 아이는 건강하다. 내가 본 어느 집 아이들 보다 건강하다. 내게 우리 아이에게 바라는 것과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 아이가 건강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아이게 건강하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고민이 없고, 기대가 없이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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