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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Jun 14. 2021

나는 아직 엄마가 필요한 나이입니다

마흔다섯, 엄마가 꼭 필요해


머리가 깨질듯한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편두통은 대학교 1학년 무렵부터 시작된 고질병이다. 다음날은 오랜만에 본가에 가기로 한 날인데 편두통이 시작되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한참 목 뒤쪽을 주무르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마사지를 해본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니 맑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앞에 별들이 반짝거리며 어지럽다. 이때 분위기 파악을 못한 핸드폰이 신나게 딩동거린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면서 슬쩍 본 핸드폰 화면에는 '우리 엄마 정금자 여사'가 반짝거린다.

"응, 엄마!"

"내일 몇 시에 올 거야? 아침 먹고 올 거야?"

"아침 빨리 먹고, 7시 정도에 출발할게요."

"알았어. 가지고 갈 거 많다. 큰 통도 좀 챙겨와."


분명히 엄마는 오랜만에 오는 딸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해 놓으셨을 것이다.

"엄마! 반찬 자꾸 하지 마시고, 오늘 더우니까 낮에는 밖에 나가지 말아요. 더위 먹어서 안돼요."

나는 엄마에게 걱정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말들을 한참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신기하게 두통이 좀 나아졌다.


요즘 나는 사람을 잘 만나지도 않았고, 무력했다. 삶에 모든 것이 좌절이었고 어둠이었다. 이러다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때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600문항에 가까운 검사지를 받아 정성스럽게 체크를 하고 3개월 정도 편한 마음으로 마음치료를 해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받았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인데, 지금까지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이겨냈는데 3개월 치료라니... 병원에 다녀온 날 사형선고를 받은 듯 나는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내가 사실은 요즘 가슴도 두근거리고, 답답하고 힘들어서 병원에 다녀왔어요."

"어디가 아픈 거야?"

"불안한 마음하고, 우울한 마음이 있대요. 내가 마음을 좀 여유롭게 가질 필요가 있는데 그게 잘 안돼서 그래요."

엄마는 마음이 힘든 딸이 병원 진료까지 받았다는 말에 놀라신 게 느껴졌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요즘 약이 엄청 좋아.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니까 마음 편하게 있어." 

라고 말씀하신다.


항상 엄마의 말은 옳았다. 좋은 세상에 태어나 마음껏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나는 행운아다. 술 좋아하는 남편 수발에 조랑조랑 매달린 어린 자식들 키우며 가정을 이끌어야 했던 엄마는 모진 세월을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고 살아오셨다. 그런 엄마에게 병원 상담은 사치였다.

"엄마~ 나는 엄마랑 얘기할 때 제일 편해."

"그래, 힘들 때 엄마랑 통화하고 풀어. 엄마도 불안하고 답답할 때 많아. 자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았던 일 생각하면 괜찮아지더라."


오랜만에 김포로 가는 길.

햇살도 좋고 음악도 좋다. 자동차 뒷자리에서 졸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난다. '우리 엄마 정금자 여사'는 더 작아진 몸집에 하얀 백발을 반짝이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엄마는 나에게 병원 진료나 상태에 대해 묻지 않으신다. 나를 위로하며 용기를 주려고 애쓰지도 않으신다. 손녀딸의 지휘 아래 뜨거운 햇살 받으며 자라고 있는 꽃과 나무를 열심히 찍고 계신다.


나도 질세라 엄마가 정성스럽게 키우는 꽃을 찍고, 열매를 따먹으며 땀을 흘리니 기분이 좋아진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풀 뽑기가 시작되고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찍으며 '도대체 엄마의 힘은 어디서 나오지?' 궁금했다. 



어쩌면 엄마의 정원은 외로운 엄마의 마음이고, 우울해지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온다. 항상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엄마. 꽃을 보면 손주를 보고 있는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고 하던 엄마의 말이 기억난다. 엄마는 지독한 고통과 어두움을 견뎌왔기에 딸의 마음을 더 이해하고 계실 것이다.


엄마만의 위로는 계속되었다. 마당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콩을 모조리 따서 까 놓으라는 특명을 내리셨다. 콩을 까고 껍질을 정리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우울할 틈도, 불안할 틈도 없다. 저녁을 먹고 엄마가 싸놓으신 들기름과 김치, 마늘종 무침, 멸치볶음, 쌈장, 참외를 들고 집으로 오니 밤 11시가 되어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늘종 무침에는 알싸한 마늘도 들어있었다. 양념 범벅이 된 마늘 한쪽을 집어 씹으니 입안이 따가울 정도로 야무지게 매운 마늘맛이 휘감는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행복하게 살라는 여든 살 정금자 여사의 따끔한 충고인 것 같다. 칼칼한 김치에도, 짭짤한 쌈장에도 엄마가 묻어있고 달달한 참외에도 엄마가 있다.


내 나이 마흔다섯.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받고 눈물나는...

뒤돌아서면 항상 엄마가 보고 싶은 마흔다섯 지금의 나는 아직 엄마가 필요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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