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45분.
머리에 위생 모자를 쓰고 머리카락 한올까지 꼼꼼하게 가리고는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방수 앞치마를 두르고 서있다. 몇 달 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학교 급식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다.
“언니! 보건증 꼭 필요하니까 미리 만들어 놓으세요.”
올해 4월, 친한 동네 동생의 한 마디에 바로 보건소로 달려가 보건증을 만들고는 대체인력으로 선택받기 위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나는 2주간의 기다림 중에 남편과 주위 지인들에게 학교 급식실 대체인력으로 지원했다고 뿌듯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냥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무료한 일상에 큰 도전이었고, 이 도전을 잘 완수해 낸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한 가지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다.
“학교 급식실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아마 두세 번만 다녀오면 더 못하겠다고 할걸.”
“왜? 무슨 일 있어? 사정이 안 좋아? 돈 필요해?”
일단,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니 얼마큼 힘든지, 정말 두세 번에 끝내고 말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에 할 말이 없고… 돈? 당연히 돈 필요하지. 아들, 딸 키우면서 지금까지, 앞으로도 쭈욱 필요한 게 돈인데 말해 뭐할까? 입만 아프지. 아마 급식실 업무 자체가 체력을 요구하는 고강도의 노동이다 보니 나오는 주위의 걱정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그동안 나는 남들이 나름 부러워할만한(?) 직장 생활을 했던 것 같다.
IMF로 힘든 9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첫 직장은 여의도 KBS였고, 이후엔 디자인 벤처기업, 그리고 결혼 후에는 아동복지교사를 거쳐 살고 있는 지역의 시청에서 근무까지 나름 순조로웠다.
그런데 2020년 생각지 못한 가정의 위기가 오면서 그동안 곱게만 살아온 내 모습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사춘기 잡는 갱년기가 시작되려는 시점과 맞물려 마음의 파도가 더 일렁였는지도 모른다.
큰일이 마무리되고 다시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면서 든 생각은 ‘강해지자!’였다. 주위에 나보다 훨씬 젊은 아기 엄마들이 육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은 나에게 자극제였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고 나도 어떤 일이든 그들만큼은 해내고 싶었다.
“언니, 저희 초등학교나 중학교 급식실에서 아르바이트해요. 기존 정규직 조리원들이 쉬게 되면 그 자리에 대체인력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 나도 소개 좀 시켜주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은 꼭 젊은 20대 30대 청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니 나도 할 수 있고 생각했다.
아마 처음에는 많이 힘들 거라는 동생들의 말을 듣고 2주 후 드디어 첫 연락이 왔다.
“여기 00 초등학교인데 내일 대체 나올 수 있어요?”
“네~ 내일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검은색 편한 바지랑 양말만 챙겨 오세요.”
약속된 다음 날,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급식실 업무에 걸맞은 복장으로 서있었다.
“빵빵이 2개만 이리로 가져오면 될 거 같은데.”
“바뜨 10개 뚜껑이랑 같이 가져와.”
“배꼽 삼발이 1개 필요해.”
역시 새로운 세계에서는 새로운 낯선 단어들이 오갔다. 그리고 눈앞에 넓게 펼쳐진 급식실의 모습만 봐도 노동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큰 숨을 내쉬고 있는 사이 첫 임무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