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선택한 건 담배였다.
악명은 알고 있다. 공익광고도 많이 봤고, 부작용이라거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손을 댔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엄벌이었다.
연기와 함께 생각도 뿌옇게 흐려져 잠시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었고,
흡연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5년의 시간동안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약자를 탓하고, 무능력하고, 속이 썩어 문들어진 '나' 가 아닌 '담배를 피우는 나'를 혐오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어떤 병에 걸린다거나, 수명이 짧아진다고 하더라도 난 그래도 싼 사람이라며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난 죄책감의 원인인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담배를 찾았고 그럴 때마다 조금 해소됨을 느꼈다.
오래가진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들던 잘못된 생각은 어느새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팡이 끄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현관에 당신의 신발이 놓여있는 걸 보거나 당신의 물건을 보기만 해도 치밀어 올랐고 그럴 때마다 도피처로 찾았던 한 개비의 담배는 어느새 두 개, 세 개, 네 개로 늘어있었다.
이미 나는 혐오의 대상도 원인도 목적과 시작하게 된 계기도 불분명해졌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끝이 없겠구나
한 공간에 있으면서 마주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모텔이었다.
사실 '탓'의 원인은 고작 내 공간의 필요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 장소를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방에 따라서 하룻밤에 3만 원에서 6만 원이나 하는 값이었지만, 당시에 난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모은 돈의 거의 대부분을 써서 한 모텔로 향했다.
규격화된 하얀 시트, 필요한 것만 몇 개 비치되어 있는 그 불친절하고도 차가운 공간에 혼자 누워있으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담겨있는 집보다 안락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장기 숙박을 환영한다던 그 모텔은 마음 놓고 울고, 풀 곳이 필요했던 나에게 너무나 적합한 곳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모텔에서 먹고 자고 울며 보내고 나니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 번째는 모아 온 돈이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부모님의 의심이었다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나는 모텔에서 생활하는 걸 부모님께 비밀로 한 채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자고 오겠다며 부모님을 납득시켰다.
'3일 뒤에 갈게', '7일 뒤에 갈게', '조금만 더 놀다가 갈게'와 같은 말로 언제까지고 속일 순 없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남의 집에서 너무 그렇게 오래 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친구 출근하고 나면 너는 그 집에 혼자 있는 거냐'
'혼자 거기서 대체 뭐 하느냐'
와 같은 의심과 질문들에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잘 지내셨나요? 저 ㅇㅇ회사 박 차장입니다!"
대학교, 지도교수님을 통해 종종 일을 맡기던 회사였다. 외주라고 할까 코워크라고 할까
박 차장님이 맡기고 간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내가 참여를 했었고, 당시에 우스갯소리로 '졸업하면 저희 회사로 오세요.'와 같은 말도 주고받기도 했다.
박 차장님이 말하던 '저희 회사'는 아니었지만, 같은 계열사의 다른 회사 분과 이야기를 하던 중 그곳에서 경력이 있는 졸업예정자이거나 졸업자를 찾는다는 소식에 내 생각이 났다면서 조심스레 취업 여부를 물었다.
면접을 봐 볼 의향이 있냐고 묻는 말에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학교 면접을 보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새벽기차에 올랐던 고등학생의 나 때와는 다르다.
타 지역에 있는 회사에 취직이라니,
이처럼 당당하고 영광스러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 면접이지 거의 내정자였다.
면접은 거의 형식상 이루어졌고, 나는 나보다도 더 기뻐하는 부모님의 곁을 당당하게 떠날 수 있었다.
나는 슬프게도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