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제 Feb 07. 2024

결심

준비

부모님과 동생이 출근하고,

집 근처 등교하는 학생들로 소란스럽던 초등학교가 조용해지면 그제야 방에서 나왔다.


여전히 집에는 작은방에 할머니가 살고 있었지만, 이제 나에게 할머니는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에 대한 혐오와 그에 따른 죄책감은 

이제야 혐오의 대상을 제대로 찾은 듯했고, 그 대상에게는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나는 조용히 내 상황을 정리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상황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답은 없었고, 우울함과 무력함은 더해졌다.




우울함과 무력감에 잠식당하다가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시간에는 또 곧잘 웃고, 또 괜찮기도 했다.


나름 환기를 시켜보고자 선택한 건 아르바이트였다.

놀기만 하는 내게 어떠한 부담도 재촉도 하지 않는 부모님을 더 이상 실망시켜 드릴 순 없다는 생각이었다.


피해자 코스프레도 하루 이틀이지.


아르바이트는 금방 구할 수 있었다 대학교 때부터 경험이 있기에 쉽게 뽑혔고 나름 잘하기도 했다.

초반엔 많이 허둥댔지만, 적응을 하면서 나름 괜찮아졌고 이를 통해 무너졌던 자존감이라거나 무력감이 조금 회복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는 일상에 나도 끼어들어갈 수 있었고,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날들이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낸 마음에 나름 뿌듯하게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으며 

오늘 하루 진상 손님이 있었네- 단체주문이 있었네- 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는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제 취업은 언제 할 거니?"



조금만 생각해 봐도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걸 알 텐데,

그저 당장 뭘 한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있었다.

스스로가 기특했고 장했다.

고작 일주일에 네 번, 그것마저도 겨우 5시간 일을 하는 걸로 만족했다.


다시 발목에는 현실이라는 족쇄가 채워진 듯했다.

아르바이트.

그건 취업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충분히 할 법한 질문이었고, 부모 입장에선 해야 하는 질문이었기도 했다.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사직서를 내던 당시 퇴사의 이유를 묻는 부모님께 대충 일이 힘들었다며 둘러댔다.


부모님은 그저 내 말을 믿어주셨다.

내 말에 회사는 악덕기업이 되었고,

'크게 데었구나.' '일이 정말 힘들었구나.' 라며 몇 개월째 방에만 있는 나를 재촉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내가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취업하기 전 용돈벌이 정도로 생각하셨다.


'아- 취직하기 전까지 혼자 힘으로 용돈 벌기로 하려는구나.' '우리 딸 기특해라'

'그럼 취업준비는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는 거니?'

'너무 힘들면 교재비나 학원비는 지원해 줄 테니 무리하지 마라.'


이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가 그렇게 숨이 막힐 수가 있을까




그나마 한줄기 희망을 봤던 감정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믿는 사람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 기대에 부흥할 수 없다.

부흥은커녕 실망만 끼칠 것이라, 해만 끼칠 것이라.


다시 길을 잃었고,

난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앞으로 전진할 수도,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막다른 길에서


나는 사라지기로 했다.




죽음을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을까.


나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나름의 배려랍시고 신중한 고민을 거듭했다.

부모님과 동생, 친구들의 생일이 있는 달은 피하고, 결혼기념일이 있는 달도 피할 것이다.

동생의 공무원 시험 합격일과 첫 출근일도

아빠가 좋아하는 산도, 엄마가 좋아하는 바다도 동생이 좋아하는 계곡도 피하고

가족 여행으로 다 같이 갔던 지역도 안된다.

중학교 때부터 지내온 정든 이 아파트 옥상도, 이 동네도 안되고


자연재해나 사고가 아닌 만큼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내가 그리워질 때마다 꺼내 볼 기록들도 

내 사진과 내가 좋아하던 사진들을 찬찬히 모아 차곡차곡 앨범 정리를 했다.


왜 이 아이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유서도

부모님의 탓이 아니다,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원망도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라며 내 선택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게 몇 번씩 고쳐가며 신중하게 써내려 갔다.



이전 10화 운이 좋은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