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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 Feb 08. 2024

생각은 말을 해야 안다

가벼워지는 순간

고백은 엉망이었다.

내 표정만 봐도 안다는 엄마에게

마지막까지 괜찮은 척을 하고 싶었지만

꾹 다문 입보다 먼저 터져 나온 건 눈물이었다.


그간 숨겨왔던 기간만큼 터져 나오는 설움과 눈물이었고, 감정을 진정시키고 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지 싶었다.

장장 20분의 침묵이었다.


말을 해야지


할머니에 대한 혐오감.

개인적인 공간을 갖고 싶었다는 이기적인 마음.

도피성 취직과 실패.

내 능력의 한계와, 그로 인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자신감도 자존감도 모두 잃었다는 것.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배 아파 낳은 딸이 능력 하나 없다는 말은 엄마한테 상처이지 않을까 싶었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말을 고르고 고르는 나를 엄마는 그저 앞에서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 나.. 담배 피워... "



엄마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고르고 골라

엄마가 가장 상처받지 않을 만한 말이라고 생각한 첫마디였다.



"나... 할머니가 너무 싫어서, 죽었으면 좋겠어서.

새벽에 지팡이 끄는 소리도 싫고 존재 자체가 싫고, 예전에 중학교 때 생리대 넣어놓은 거랑 밥 먹으라고 하는 거 다 싫어서, 왜 오래 사나 싶어서.

없어졌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이런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자꾸 생각이 드는데, 울고 싶은데, 집에는 공간이 없고 그래서 모텔 가서 자고 거기서 울어.

그러다가 취직. 취직 제안이 왔는데 그냥 거기로 생각 없이 간 게. 그냥 할머니 때문에 간 건데, 거짓말이었어 거기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고 일도 그렇게 안 힘들었고 그냥 내가 못해서 나온 거야.

아르바이트 왜 하냐면, 나 이제 전공 살려서 못해, 일 못 대학교 괜히 나왔어 그냥, 그냥. 돈 버린 거야."



말을 고르고, 정리하려고 보 시간이 무색하게

두서없이, 경위 설명도 없이 말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눌러 말들이 서로 자신이 먼저 튀어나가겠다고 경쟁이라도 하듯 튀어나왔다.


그렇게 대화를 한 건지

감정을 쏟아낸 건지 모를 내 말이 끝나고, 시의 침묵.

엄마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 담배는 얼마나 피웠어?... 지금은? 지금도?"



가장 파장이 클 것이라고 예상했던 할머니와의 문제라거나, 취직의 실패 따위는 제쳐두고 가장 먼저 한 질문이자 내 말에 대한 마지막 질문이었다.

피운 지 2년, 지금도 종종 답답할 때면 피워.



"목도 안 좋은 애가.. 목에 안 좋을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거야?... 엄마랑 약속해, 다시는.. 다시는 몸에 안 좋은 일은 하지 마,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영향이 가고, 건강에 안 좋은 건, 응?"



'스스로를 갉아먹지 마.'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한 목소리에 푹 숙인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마주한 건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발발발 떨리는 몸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엄마였다.




누군가는 기호식품으로, 누군가는 습관처럼.

담배란 건 미성년자만 아니면 딱히 잘못된 건 아니니까.


다만, 담배가 내게 엄벌이자 자해였던 건 내 호흡기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기관지 쪽이 약했던 나는

어릴 때부터 계절이 바뀌는 시기나, 조금만 건조해져도 콜록대기 십상이었다.


감기를 달고 살고, 음식을 먹고 나서는 특유의 답답한 느낌에 몇 번씩 헛기침을 해대기도 했다.


어릴 때야 폐렴이나 천식으로 번질까 봐 노심초사해가며 조심시켰지만

성인이 된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신경 쓰는 이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거듭, 또 거듭해서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엄마는 막혀있던 큰 숨을 뱉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


토해내듯 쏟아낸 감정들에 엄마가 한 대답이었다.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 라며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조금 웃어 보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올해로 96세였다.

귀는 보청기를 껴도 거의 안 들리셔서 대화를 할 때는 귀에 대고 목이 터져라 크게 크게 말을 해야 간신히 알아듣는다.

최근 어선 나이가 나이인지라 치매기도 조금 보이셔서 밤과 낮을 헷갈려하시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평생 살아온 생활습관 같은 건 고쳐지지 않아서, 엄마가 만들어 놓은 반찬이나 국을 합쳐놓거나

장롱을 내다 버리겠다며 그 큰 농 밑에 이불 깔고는 혼자 고 내려가려는 걸 경비 아저씨가 발견하고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고집은 또 얼마나 세신지, 속이 얼마나 뒤집어지는지 아니?'



애써 웃으며 말하는 엄마를 나는 여전히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런 나를 가만 바라보며 엄마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너 혼자인 줄 알지? 사람은 말이야, 생각하는 거 다 똑같아.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그만큼 늙고 병든 노인을 모시고 산다는 게 힘든 일이야. 하물며 할머니의 딸인 고모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


"네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전적으로 동의해. 우리 딸들 처음에 여기로 이사 올 때 각자 방이 생기는 줄 알고 너무 좋아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해. 막상 이사 오고 나서는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실망했을 법도 한데, 너희들 '우리 방'이라고 예쁘게 꾸민 푯말 방 앞에 걸어놓은 거 기억나? 엄마는 그게 너무 미안하고 너무 고마웠어."


"너무 힘들었지? 힘들었겠어. 취직에 집에 안팎으로 문제가 많았네 우리 딸. 엄마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아르바이트 왜 하냐고 잔소리나 하고 말이야. 엄마가 취업 안 하냐고 한 건, 아르바이트가 별로라서... 별로, 그래 별로인 것도 맞지만 네 걱정 때문이었어. 오래 서있는 게 얼마나 힘든데, 더군다나 몸도 약한 애가. 엄마는 그냥 네가 체력적으로 힘들까 봐 그랬어. 근데 마음이 힘든 것 보다야 몸이 힘든 게 낫지."


"이 모든 걸 어째 혼자 견디려고 했어 우리 딸. 엄마가 몰라줬네.. 근데 있지, 말을 하지 않으면 몰라. 말을 안 하고, 꼭꼭 숨겨만 놓으면 아무도 몰라."




말을 안 하면 모른다.


그 당연한 이치를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시도조차 해봤는가


말하지도, 말할 생각도 안 해보고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가족이 원망스럽고 서운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 넣어 둔 담배를 숨기지 않고, 괜히 사촌 언니의 말을 꺼내며 그게 신호였다고 알아채 주기를 바랐다. 깨달아주길 바랐다.


얼마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는가.

혼자 생각하고, 끝을 내고, 마지막이라고 멋대로 결론 내렸다.


필요했던 건

정성스럽게 적은 유서나 차고 넘칠 만큼 쟁여놓은 기록들과 사진들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말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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