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기억'을 채운 공간의 가치 혁명
"아빠, 근데 여기
강남역 제일 좋은 자리인데,
왜 이 가게는 문을 닫았어?"
주말 오후, 딸과 함께 서울의 가장 뜨거운 심장부인 강남역 근처를 걷다가 들었던 질문이다. 대로변, 건물의 모서리, 유동인구의 눈높이에 정확히 맞춰진 최고의 입지. 한때는 작은 옷가게 하나도 수억 원의 권리금을 주고 들어왔던 그 '황금의 1층' 자리에 큼지막한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딸아이의 순수한 질문은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맴돌던 화두를 다시 끄집어냈다. '왜 가장 좋은 자리가 비어 있는가?' 이는 단순히 경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소비 행태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지난 27년간 기업의 미래 전략을 고민해 온 경영 컨설턴트로서, 나는 이 텅 빈 공간이야말로 오프라인 리테일의 '종말'이 아닌 '재탄생'을 알리는 가장 명확한 신호라고 확신한다.
과거에는 1층이 가장 비쌌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물건을 '가장 쉽게'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가 필요한 대부분의 물건은 클릭 한 번으로 다음 날 아침 집 앞에 도착한다. '쉬운 판매'라는 1층의 핵심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 1층의 문턱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려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을 넘어 온라인이 결코 줄 수 없는 '새로운 무언가'를 팔아야만 한다. 텅 빈 1층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물건을 팔지 않을 거야.
나는 이제 '경험'과 '가치'를 팔 거야."
오프라인 공간이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경험 가치의 극대화'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아도, 시간을 소비하고 싶어서 밖으로 나선다. 이 욕구를 정확히 파고든 것이 바로 더현대 서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복합 공간들이다.
더현대 서울은 전통 백화점의 '판매 효율 극대화' 공식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돈이 되어야 할 가장 좋은 중앙 공간에 거대한 실내 정원(사운즈 포레스트)을 만들었고, 층고를 높여 시원한 개방감을 주었다. 이는 경영학적으로 보면 '비효율적인 공간 배치'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가장 '효율적인 투자'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아름답고 편안한 공간에서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물건 구매라는 '목적성'이 사라진 공간에서, 사람들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눈다. 즉, 더현대 서울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고객에게 '하루를 온전히 즐기는 새로운 경험'을 파는 곳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열광하는 팝업 스토어는 이러한 경험 경제학의 핵심이다. 팝업은 단순한 '할인 행사'가 아니라, 브랜드가 기획한 독특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소셜 미디어에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취향과 존재감을 인증'하는 놀이의 공간이다.
오프라인 리테일은 이제 '유통 채널'을 넘어,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목격할 모든 도심 개발의 핵심 원리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공간 혁명은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 땅'인 롯데칠성 부지 개발 계획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딸아, 롯데가 이 수조 원대 가치의 부지에 짓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쇼핑몰이 아니다. 바로 업무(오피스), 숙박(호텔), 판매(리테일), 문화 시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최종 진화형 복합단지(MXD, Mixed-Use Development)'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초고층 오피스 타워다. 서울시와의 사전협상을 통해 용적률 인센티브를 최대한 확보하여 강남을 압도하는 마천루를 세우고, 이곳에 금융, IT, 전문 서비스 분야의 최고 인력들을 끌어모을 것이다. 즉, 돈과 지식이 거래되는 비즈니스 중심축을 만드는 것이 뼈대인 셈이다.
그리고 그 뼈대 주변에 살을 붙이는 것이 바로 프리미엄 리테일과 호텔이다.
오피스: 고소득 전문직 인구라는 안정적인 수요를 창출한다.
호텔: 글로벌 비즈니스 수요를 충족시키며 지역의 위상을 높인다.
리테일: 이 모든 사람들과 강남의 VVIP를 위한, 더현대 서울보다 한층 고급화되고 차별화된 '경험과 문화'를 제공한다.
롯데칠성 부지는 단순한 상업 공간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 엔진'이자, 그 엔진이 돌아가도록 윤활유를 공급하는 '최상급 생활 문화 생태계'가 될 것이다. 텅 빈 1층의 경제학은 이제 '오피스와 문화가 교차하는 MXD의 경제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딸아, 아빠는 네가 이 사회를 읽는 시야를 넓히기를 바란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변하고, 그 변화의 징후는 딱딱한 경제 지표나 어려운 보고서 안에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 풍경에 숨어 있다. 텅 빈 강남역의 1층, 그리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더현대 서울의 실내 정원, 그리고 곧 들어설 롯데타운의 거대한 설계도. 이 모든 것이 미래 경제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란다.
앞으로 공간의 가치는 '위치'가 아니라, 그 공간이 방문객에게 '얼마나 특별한 시간을 선물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높은 임대료를 받는 대신,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보낼지’를 고민하고, ‘어떤 새로운 만남을 가질지’를 설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될 거야.
이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앞으로 5년 뒤, 10년 뒤 이 공간들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컨설턴트인 아빠가 너에게만 알려주고 싶은 가장 실전적인 경제 이야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