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 한 통이 던진 질문: 고객관계를 다시 생각하다

27년차 전략가의 사색

by 도진

주말 오후, 집으로 커다란 멜론 한 박스가 배달되었다. 정갈하게 포장된 고급 과일 상자. 보낸 이는 70대 어르신이었고, 수신인은 나의 아내였다. 은행에서 프라이빗 뱅커(PB)로 근무하는 아내에게 웬 선물일까. 궁금해서 물었다. “이게 뭐야?”


아내는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며칠 전 어버이날, 혼자 계시는 고객 어르신께 카네이션을 보냈단다. 부인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고, 자식들은 모두 미국에 이민을 가 있어 근처엔 아무도 없다. 가족이 없어 아무런 연락 없이 어버이날을 보내실 그분이 마음에 걸려 조심스럽게 카네이션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냥 ‘인간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멜론은, 그 조용한 배려에 대한 어르신의 응답이었다.


그 풍경이 오래 남았다. 바야흐로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다. 고객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AI 챗봇이 질문을 응대하며, 로열티 프로그램은 개인 맞춤 혜택을 자동으로 계산한다. 우리는 고객 관계를 ‘과학’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과학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멜론 앞에서 나는 문득 멈춰 섰다. 고객관계란 과연 무엇인가. 멜론은 고객 만족 지수(NPS)로는 계산되지 않는 관계의 본질을 보여준 건 아니었을까.


요즘 전략 컨설팅 업무에서 고객 전략을 수립할 때면, CRM, 고객 여정, 세분화, 페르소나 설계 등 익숙한 툴과 프레임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고객은 분석의 대상이고, 관리의 객체다. 고객 경험(CX)은 측정되고, 점수화된다. 하지만 고객은 정말 그렇게만 존재하는가. 고객은 단순히 프로파일링 된 소비자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고마움을 느끼며, 때때로 외로움에 눈물을 삼키는 사람. 우리가 고객을 숫자나 그래프로만 바라보는 순간, 관계의 본질은 이미 멀어진다.


아내가 고객에게 보낸 카네이션은 사실 비용으로 따지면 1~2만 원 남짓의 소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정서적 무게는 그 몇 배, 몇십 배에 달한다. 그건 고객이 “기억되었다”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케팅 용어로는 리텐션이나 이탈 방지라 부르겠지만, 실상은 ‘관계의 기억’이었고, ‘관심의 신호’였다. 고객이 기업을 다시 찾는 이유는 제품의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 브랜드, 그 사람, 그 조직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했는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은 결국 ‘흉내 내는 도구’ 일뿐이다. AI는 감정을 인식할 수 있어도, 공감할 수는 없다. CRM 시스템은 고객의 구매 이력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그 생애의 외로움은 기록하지 않는다. 고객을 진심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간이 ‘감정으로 반응할 수 있을 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고객관계는 단순히 ‘거래’가 아니라 ‘기억’이다. 대체로 기억되는 관계는 작고 사소한 순간에서 비롯된다. 누군가 퇴근길에 불 꺼진 매장을 잠시 들러 인사했을 때, 갑작스레 병환으로 상담이 미뤄졌을 때 한 마디 안부를 전했을 때, 그때 고객은 느낀다. ‘이 사람은 나를 고객이 아닌 사람으로 본다’고. 이런 관계는 반복되는 거래보다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형성한 사람은 고객의 기억 속에 브랜드보다 더 선명히 남는다.


기업 전략 측면에서 보자면, 이제 고객관계를 다시 디자인해야 할 시점이다. 고객을 정밀하게 분류하고, 고객 여정의 페인포인트를 줄이며, 실시간 리커멘데이션을 제공하는 체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은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게 도와주는 것’에 불과하다. 기억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다. 그러므로 진짜 전략은 '기억되는 관계’를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제나 감정에서 비롯된다.


아내는 고객에게 아무런 보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네이션을 전하며 조심스러워했다고 했다. 불편해하시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그래도 안 전하면 더 후회할 것 같아서 보냈단다. 고객은 아무 말 없이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멜론이 왔다. 아무 말 없이.


나는 그 멜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고객관계의 본질이 아닐까. 수백만 명의 고객 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한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만 움직인다. 우리는 고객의 ‘현재 행동’을 분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정서적 울림에 반응하는지는 놓치기 쉽다. 고객의 마음을 얻는 일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작은 관심과 인간적인 기억이다.


기술은 강력하지만, 완전하지 않다. 진심은 느낄 수 없고, 고마움은 연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묻는다. “기술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왜 멜론 한 통이 더 오래 기억되는가?”


아내가 카네이션을 보낸 날, 고객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멜론을 받은 날, 아내 역시 PB가 아닌 사람으로서 대접받았다. 그 조용한 주고받음 속에, 관계의 본질이 있었다.


우리는 고객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아마도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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