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차 전략가의 사색
새벽 네 시. 평소처럼 눈이 떠졌다.
10시에 자서 이 시간에 일어나는 생활이 익숙해진 지 오래다. 아침 운동으로 하루를 여는 루틴은 어느덧 내 삶을 구성하는 기본 문장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다르다. 어깨 한쪽이 미세하게 아프다. 잠깐 무리했나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괜찮아지겠지. 언제나처럼 여섯 시, 피트니스센터 문을 연다.
트레드밀을 달리며 땀을 내고, 이어서 상체 운동에 들어간다. 그런데 레풀다운을 잡은 순간, 팔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올 초에도 왼쪽 어깨에 석회성 건염이 와서 한동안 운동을 쉬었다. 그 뒤로 조심하긴 했는데, 이번엔 오른쪽이다. 아프다는 건 언제나 무언가를 지나쳤다는 뜻이다. 조용히 다가와 경고음을 울리지만, 우리는 ‘그 정도야’ 하고 넘기기 쉽다.
운동은 나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혈압이 오르고, 복부 비만이 심해지던 때, 더 늦기 전에 몸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고 매일 새벽 체육관을 찾았다. 1년 동안 꾸준히 다니며 몸은 분명 좋아졌다. 복부둘레도 줄고, 혈압도 안정됐다. 그런데 지금, 그 운동이 다시 나를 해치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운동이 몸에 주는 신호를 무시한 채 일상의 루틴으로만 밀어붙였던 건 아닌가 돌아본다. 회복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쉬면 안 된다’는 강박 속에 회복의 시간을 죄책감으로 받아들였다. 내 몸은 휴식을 원했지만, 나는 성과를 원했다. 그렇게 조율되지 않은 몸과 의지 사이의 틈이 아픔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감각은 낯설지 않다. 몸이 아프다고 느낄 때와, 기업이 위기에 빠질 때 느끼는 감각은 묘하게 닮아 있다. 겉으로는 잘 굴러가고 있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이상한 낌새가 돌고, 무시하고 나아가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몸도, 조직도 경고를 보낸다.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신호’로 받아들이느냐, ‘불편’으로 무시하느냐다.
많은 기업들이 성장에 집중한다. 성과를 내고, 시장을 넓히고, 경쟁자를 압도하려 애쓴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전혀 다른 국면에서 찾아온다. 코로나 팬데믹은 모든 산업의 체온을 낮췄고,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세계 공급망의 균형을 흔들었다. 지금은 AI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새로운 기회를 잡는 ‘적응력’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구조적 회복력, 즉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기업 생존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위기의 파고는 모두에게 온다. 그런데 어떤 기업은 흔들리고 무너지고, 어떤 조직은 휘청이지만 다시 선다. 그 차이는 위기를 피한 데 있지 않다. 회복의 구조를 평소에 내재화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통증이 왔을 때 이를 ‘회복의 시그널’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오늘도 어제처럼 살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스스로를 밀어붙이면, 결국 몸은 멈춰 세운다. 몸은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다. 이 상태로는 안 된다고.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감각이 자주 찾아온다. 눈은 흐릿해지고, 회복은 더뎌지며, 피로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약함의 증거라기보다는 속도를 조절하라는 신호라고 느껴진다. 오래 살아남으려면, 더 빨리 가는 법이 아니라 언제 멈추고 쉬어야 하는지를 아는 감각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의 몸이나 기업의 조직 모두에게 해당하는 진실이다.
오늘, 나는 운동 대신 스트레칭을 했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듣기로 한 것이다. 성장은 언젠가 회복을 요구하고, 회복을 무시한 성장은 언젠가 붕괴로 이어진다. 내 몸도, 내가 속한 조직도, 더는 무리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다.
이제는 회복을 설계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