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낯선 그림자 – 비문증이 남긴 교훈

27년차 전략가의 사색

by 도진

눈앞의 낯선 그림자


새벽이었다. 습관처럼 이른 시간에 일어나 운동화를 신었다. 그날따라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공기는 차가우리만치 투명했다. 몸이 깨어나기 시작할 즈음, 문득 시야 한쪽에 작은 점 하나가 어른거렸다. 처음엔 눈에 뭐가 붙었나 싶었다. 깜빡이고 비벼도 사라지지 않았다. 빛이 바뀌면 위치도 바뀌었다. 낯설었다. ‘이게 비문증이라는 건가…’ 순간,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신체의 노화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찾아온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슬그머니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존재를 알리는 식이다. 비문증은 그러했다. 격렬한 통증도, 일상을 파괴하는 질환도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묵직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삶은 단지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이 아니다. 때로는 변화가 주는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낯선 그림자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조화와 화해의 시작이었다.



산을 내려오며 비로소 보이는 풍경


젊을 땐 늘 ‘오르는 일’이 중요했다.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짜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정상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있었고, 거기에 도달하는 속도와 효율이 곧 나의 가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려오는 시간’이 주는 의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올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올라갈 때는 숨차서 보지 못했던 들꽃, 너무 바빠서 느끼지 못했던 바람의 결, 그리고 구불구불한 길 저 너머에 펼쳐지는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 내려오는 길은 속도를 늦추라는 은유이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계를 직시하라는 메시지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50대 이후의 나는 더는 달리지 않았다. 대신 돌아보고, 곁을 살피고, 느끼고, 이해했다. 화해란 그런 것이었다. 불완전한 과거와도, 점점 느려지는 몸과도, 더는 젊지 않은 나 자신과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그 속에서 나는 새로운 전략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전략’은 속도전이 아니라 방향과 균형의 기술이며, 변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감지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낯선 그림자 하나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숙사업, 다시 보는 눈


기업의 전략도 어쩌면 이와 닮아 있다. 성장의 정점에 다다른 뒤, 더 이상 숫자가 오르지 않고, 고객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해지고, 신사업은 성과 없이 표류할 때, 많은 CEO들은 질문을 던진다. “이 사업, 이제 끝난 거 아닐까?”

우리는 흔히 ‘성숙산업’을 '성장이 멈춘 시장', ‘캐시카우’, 혹은 ‘정리대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올라가는 길에서만 세상을 본 결과는 아닐까.


내려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전략이 있다. 성숙한 사업에는 시간이 남긴 자산이 있다. 고객과의 오랜 신뢰, 프로세스의 정교함, 내재된 기술력과 조직의 숙련도. 문제는 이들이 ‘낡았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낡은 방식’으로만 본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재구성의 재료가 된다.


지금 이 순간, 어떤 CEO는 성숙사업의 작은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략가는 거기서 새로운 시작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 산을 내려오며 보는 풍경처럼, 다른 길과 다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객을 다시 정의하고, 새로운 니즈를 연결하며, 지금까지 축적된 내공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율하는 것.

성숙한 사업이 전환의 시간을 맞이할 때 필요한 건 '화려한 혁신'이 아니라, 조용한 화해와 통찰의 기술이다.



맺으며


비문증은 눈앞의 작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시선을, 삶을, 그리고 전략을 다르게 만들었다. 조금씩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림자는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작은 힌트일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성숙의 시간은 끝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림자 앞에서 움츠러들기보다는, 그 그림자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인생에서도, 경영에서도, 두 번째 산을 오를 수 있다.

keyword
이전 05화유튜브와 AI가 만연한 시대, 인문학을 돌아보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