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뭐든지 될 수 있다는 허상이 만연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신분제가 폐지되고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듯하다. 그런 탓에, 개인이 되고 싶은 무언가가 되지 못했을 때, 그 원인을 노력 부족으로 돌리는 일 또한 꽤나 상식적인 발상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참 잔인하다. 한참을 닿을듯 말듯 하다가 끝내 닿지 못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잔인한 아름다움도 분명 있다. 나 또한 그것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잔인하다는 것은 변함없다. 뭐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제대로 된 그 무엇도 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나는 귀족이 되고 싶다. 어떤가? 이것은 가능한가? 깊고 처절한 사색 따위는 돈이 대신 해주는 덕에 사색 따위 불필요하며, 그렇기에 고통 속에서 피어난 예술 따위 결코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귀족'이 되고 싶다. 그들은 마음이 여유로우며 천진난만하고 낙관적이다. 그들은 구질구질한 세상살이와는 멀리 떨어진채, 어깨를 피고 가슴을 당당히 내밀고서 살아간다. 아무리 구질구질한 녀석들이 그런 모습을 아니꼽게 보고는, 자기들이 있는 바닥으로 끌어내리려 한들, 그들은 끄떡없다. 그것은 그들의 마를 줄 모르고, 솟아넘치기만하는 돈이 철통으로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75년 전처럼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변함 없다. 물론, 그들에게도 고충은 있을 것이다. 선천적 또는 후천적 병환이라든가, 애정의 결핍이라든가 하는 정서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질구질한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깊은 사색이나 구질구질한 금전문제로 죽음까지 내몰릴 일은 없지 않은가.
나는 돈이 없고 사색이 넘치고 고통 속에서 피어난 예술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며, 항상 마음이 초조하고 비관적이며 그누구보다도 구질구질한 세상살이에 놀아나고 있다. 나의 어깨는 말려 있고 가슴은 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똥구덩이 속에 빠져있는 나이기에, 아주 가끔씩 그속에서 여유와 천진난만함 그리고 희망 같은 것들을 찾아내면 마치 대단한 것을 찾아낸 양, 별 호들갑을 떨며 온몸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되고 싶다' 와 같은 별 시답잖은 '땡깡부리기'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미 작가이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아직 무명이다. 돈이 전혀 벌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잘 팔리는 또 이름 깨나 날리는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런 구질구질한 에세이에도 사람들이 관심 가져 읽고, 기꺼이 돈을 낼 것 아닌가. 그렇게 되기 전까지, 이딴 에세이 따위 아무리 써내린들 별 의미없다. 작가가 이름을 날리려면, 소설을 써야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죽을 각오로 소설을 쓰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소설은 이렇게 마냥 구질구질하기만 하지는 않다. 그딴 소설을 쓰는 작자들도 깨나 있는데, 나는 그딴 소설 따위 읽고 싶지 않다. 그런건 잘 팔릴 리도 없다. 내 소설은 우선 재미있다. 슬프다. 아름답다. 웃기다. 화가 난다. 공감된다. 위안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또 즐긴다. 그리고 내가 쓴 글에도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즐거운 일이야 이것말고도 얼마든지 있기에, 꼭 그런 이유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실은, 글을 쓰지 않으면 발광할 것 같아서이다. 아니, 발광을 해서 글을 쓰는 것인가? 어쨌든, 글을 쓰는 형태로 발광하는 것이 남보기에도 덜 흉해보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나의 넘치는 사색을 내 조그만한 머리통 안에만 가둬두기에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러니, 나는 살려고 쓰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허세도 장난도 거짓말도 아니다. 나의 절규가 예술이 되고 그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는 지적 호기심을 채우거나 위안 및 즐거움을 얻는다면, 그리고서는 내게 돈을 쥐어준다면, 나는 그럭저럭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프로세스를 보고선 예술가가 낭만이 너무 없는 것 아니냐 비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예술가란 태평스럽게 낭만 속에서 살아가려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란, 결핍과 불만족으로 가득찬 심해 속에서 숨을 쉬면 괴로워질 것을 알면서도, 낭만이라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켁켁'댈 줄 아는, 눈을 뜨면 미치도록 따가울 것을 알면서도 눈을 뜰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럭저럭,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펜, 붓, 마이크 따위의 도구가 전혀 필요 없다. 그들은 맨몸으로 일광욕을 하듯, 온몸으로 그럭저럭 세상을 만끽할 뿐이다. 아마 그런 사람은 어린이들 정도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나는 22살이다. 분명 노인네들이 말하는 청춘의 범위에 딱 들어가는 나이일 것이다. 어떤가? 이런 나의 글에는 푸른빛이 감도는가? 이것이 정말 노인네들이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그것이 맞는가? 아마 아닐테지. 그렇지만, 이거야말로 바람직하고 진실된 청춘의 표상이다. 젊음은 나약함이요, 무방비함이요, 죄악이다. 청춘이나 중년이나 노년이나 바라는 것은 다를지 몰라도, 필요한 것은 모두 똑같다. 결국 돈이다. 돈, 돈, 돈, 돈, 돈, 돈. 나는 돈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