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 불리지 못한 아버지

나의 철학적 멘토이자 파괴자

by Justitia

나의 아버지는 1945년과 1950년이라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두 축을 이루는 격동의 시간들을 지나며 소년에서 청년이 된 소위 찢어지게 가난하던 해방 후의 <보릿고개>와 <한국전쟁>을 겪어낸 세대이다.


또한 가족계획이나 피임이란 단어가 생소하던 시대의 가난이라고만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시골농가의 7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 <개천용>으로 만주로 유학을 가셨던 큰 형님과 뚜렷한 이유도 모르고 어릴 때 돌아가신 또 한 분의 형님을 대신해 원치 않게 장남의 자리를 물려받아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독학을 거듭한 끝에 일본 소학교와 중. 고등학교를 지나 20대 후반 소도시의 신문기자로 일을 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신문기자시절 중매로 엄마를 만나 천운으로 결혼을 했고 정치적 신념에 따라 국회의원 투표를 하러 간 투표소의 투표함 안에서 누구에게 투표하는지를 쳐다보던 눈동자를 향해 과감한 한 표를 행사하고 그 길로 사직서를 던지고 나오셨다는, 아버지로서는 영웅담이지만 엄마에게는 철없는 가장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자랐다.


어린 나이에 만주로 유학을 떠날 정도의 영특함을 가지고 있던 형 (이 분은 끝내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는 풍문과 북한으로 가셨다는 풍문을 남긴 채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연좌제>라는 시대의 잔인한 족쇄를 선물하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민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원죄와도 같은 불안을 달고 살아야 했고 어려서 세상을 떠난 또 다른 형을 대신해 졸지에 장남이 돼버린 아버지를 평생 훈장이셨던 나의 할아버지는 아주 엄격하게 키우셨나 보았다.


그런데 그 엄격한 훈육의 실상은 척박한 시골의 초가집에서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새벽에 깨워 맨 발로 눈 쓸기 내지는 본인의 실수는 물론 남은 여섯 동생들의 잘못까지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어린 내가 듣기에도 훈육을 넘어 아동학대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게다가 가난하기는 얼마나 가난했을 것인가.. 경제관념 제로인채 평생을 책상물림으로 사셨던 서당 훈장님인 할아버지께서는 그 시대 남자어른 답지 않게 할머니를 끔찍하게 챙기셨는지 할머니 역시 생활력이 없어 집에는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동생들과 그에 대한 모든 금전적인 책임은 장남인 아버지의 몫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한 야만의 시절을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척박했던 교육환경과 사회적인 배경이 만들어낸 열악함이 더해져 스스로 강해져야만 했던 아버지는 4남매를 키우면서 우리에게 주입하셨던 두 가지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사. 농. 공. 상의 직업관이 투철하셨고

-그러한 가난을 겪었음에도 돈보다는 명예가 우선이셨다.


그래서 우리 4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직업의 귀천과 돈을 천하게 보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이는 두고두고 우리의 고개를 젓게 만들었지만 형제들 역시 교육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40이 다 되어 본, 늦둥이 축에 들었던 나는 큰 언니와 9살의 나이 차를 가지고 있었고 중간에 있는 두 오빠들과는 성이 달라 무늬만 다복한 4남매의 막내였지 거의 혼자 크다시피 했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언니 오빠들은 모두 영재급의 성적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막둥이로 태어난 나는 타고난 눈치로 귀염과 영특을 자랑하는 아이였어서 무섭고 엄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또래보다 한 살 빠르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곧잘 따라가기도 하고 타고나기를 독서광이었던 막내에게 아버지는 점점 욕심을 냈고 아침이면 배달되어 오는 어린이 신문을 모두 읽고 하루에 두자씩이었던가.. 한문 배우는 코너에 나오는 한자를 외우지 못하면 제시간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가끔은 벅차고 짜증도 났지만 그래도 별 반항 없이 수행했고 저녁에 아버지가 퇴근해서 오시면 아버지의 등을 안마해 드리면서 넓은 등을 칠판 삼아 우리나라 지도도 그리며 지리공부도 했고 반장선거라도 할라치면 몇 날 밤을 아버지가 써 주신 원고를 외우며 논술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방식은 늘 성공이었다.


이렇게 적으면서 생각해 보니 선행학습의 끝판왕이었던 것 같다.

무려 1970년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행복했던 시간들은,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라고 기억이 되는데,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과자들을 갱생시키기 위한 정부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재단의 지방 책임자로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셨고 늘 저녁 6시면 칼퇴를 하셔서 어린 나와 교육용 프로그램을 같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아버지 발등을 밟으며 춤을 추기도 하고 역사에 관한 가르침도 받고 장기도 배우곤 했다.

그리고 엄마와 나와 겸상을 하시면서 낮에 만났던 전과자나 검사들의 이야기와 아울러 여러 가지 법적인 사례들에 대해서 알기 쉽게 아주 현실적인 법강의를 해주셨다.

그 덕에 나는 뒷날 대학의 과를 정할 때 법학이라는 과목을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고 아마도 아버지 보시기에 영특했던 막내에게 당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은근히 투영하신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다 큰 언니 오빠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하고 냉정했던 아버지가 나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시절이었는데 몹쓸 균열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던 언니와 내가 제일 좋아했던 둘째 오빠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사춘기가 시작되는 고등학교를 모두 타지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서 다니게 되었고 선천적으로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큰오빠가 나와 같이 집에 남아 살면서 근처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큰오빠 역시 중학교 3학년까지 반장을 하면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고등학교 연합고사에서 1차에 떨어지고 2차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아버지는 오빠에 대한 실망으로 점점 폭주하기 시작했다.


내 아버지는 교육의 부분에 있어서는 신기하리만큼 딸과 아들을 구별하지 않으셨다.

어느 자식이든 하고자 하는 만큼 지원을 해주신다는 것이 아버지의 교육철학이었고 나중에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도 하셨는데 그때는 몰랐다. 하고자 하는 만큼의 주체가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 본인이 만족할 만큼이었던 것을.


그리고 그 첫 번째 희생양이 바로 큰오빠가 되었고 아버지가 원했던 학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큰 오빠는 우리 형제들 앞에서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를 당했으며 고립이 되었다.

편애의 시작이었다.


나머지 형제들과 다르게 아주 내향적인 성격의 큰오빠는 점점 자기만의 동굴로 숨어들었고 그게 못마땅한 아버지는 점점 더 선을 넘는 언어폭력과 사춘기의 오빠에게 체벌을 가하면서 두 부자사이는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엄마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피아노를 시작했던 나는 오빠와 아버지의 갈등이 보기 싫어 한동안은 피아노에 몰두를 하기도 했고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도 열심히 공부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정말 사소하게 시작된 잔소리가 계속되면서 아버지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했고 피아노를 치던 나를 내보내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시작된 체벌이 결국 피를 보고서야 끝이 났고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그 현장을 보고야 말았던 어린 나와 여리디 여린 엄마는 우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자식과 형제에게 부당하게 쏟아지는 학대를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동생과 엄마 역시 오빠와 같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알았을까?


그때가 시발점이었으리라.

영특하고 귀엽기만 했던 막내가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에서 배웠던 법의 정신과 정의에 대해서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하고 아버지의 행위가 사랑이 아니라 학대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나는 아버지에게서 서서히 등을 돌렸고 냉담해졌으며 큰오빠와의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 무렵부터 아버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막내의 광기 어린 반항을 마주해야 했다.


대학입시에서도 나는 무조건 서울로 가야 했다. 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길만이 유일하게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라 믿었기에 필사적이었으나 아버지가 정한 다섯 개 대학에 미치지 못했던 나의 성적은 초라하게 나를 집에 주저앉혔다.

그리고 역시나 기대했던 막내의 지방대 입학은 아버지의 분노를 샀으며 선택받은 언니와 둘째 오빠의 독일유학에는 아낌없는 지원을 하면서도 나와 큰오빠에게는 등록금 이외에는 금전적인 지원도전혀 없이 집에 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아버지에게 나는 아버지가 정한 저녁 9시 통금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반항을 했고 머리카락까지 잘릴 뻔 한 지경까지 가면서도 나는 쉼 없이 바락거렸다.

아버지로 인해 동굴로 숨어버린 큰 오빠같이 살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었기에.


결과적으로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았던 언니와 둘째 오빠는 나름의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사뭇 다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게 되었고 같이 살아야 했던 큰오빠는 짧지 않은 시간을 우울증으로 나는 공황장애로 힘들어야 했고 내 사랑하는 엄마는 갱년기와 함께 찾아온 깊은 우울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고향에서의 우리 형제들은 성공한 자식들로 유명하다.

4형제와 배우자를 포함 7명 중에서 두 명은 석사이고 세 명이 독일박사이며 세 명이 대학의 교수이자 저명인사들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아직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에 살고 있는 나는 3년 전 아버지의 소천으로 부랴부랴 하루가 넘게 걸리는 시간을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다시 차로 달려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버지 손을 잡고 원망의 통곡을 하고 말았다.

한 번이라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셨어야 했다고, 이렇게 가시는 건 아니라고..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했던 외식. 드시고 싶다시던 추어탕을 앞에 두고 나눴던 어색한 단답형의 대화들 끝에 "아빠라고 불러봐. 막내한테 아빠라고 한번 듣고 싶다." 하시던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나는 끝내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어릴 때 우리가 둘도 없던 부녀지간이었을 추억의 그 시간들에 나는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고 싶었다.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중에 내가 아이들을 낳아 키우게 됐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이들이 부르는 아빠소리가 너무 좋을 정도로..


하지만 가정 내에서 아버지로서의 권위에 집착하신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아빠소리를 허용하지 않았고 막내의 광기 어린 반항이 시작된 후로는 나는 아예 아버지라는 호칭 자체를 사용하지 않으려 애를 썼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지금 후회스럽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대답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나에게 정신적 토양이 되고 뼈대가 되는 학문적인 지식들 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 양식이며 사고의 철학까지를 알려주신 분이지만 동시에 유년기에 형성된 나의 그러한 모든 긍정적인 삶과 철학을 파괴한 파괴자이기도 하기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나의 아버지가 정리되지 못한 미제로 남아있다.


살아온 시간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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