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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뮤지엄 아워스(2012)

일상이라는 풍경

by 돌레인

<중세의 뒷골목 풍경>을 읽으며 16세기 유럽인들의 생활상을 상세히 그린 브뤼헐의 그림을 좇다 찾아보게 된 영화다.

앤은 한때 친했으나 이젠 소원해진 사촌이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병원 전화를 받곤 급히 미국에서 오스트리아로 간다.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앤은 빈 미술사 박물관 전시실의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는 요한의 친절한 도움으로 하루하루 버텨간다.

분주한 삶에서 은퇴해 조용히 지내고 싶어 택한 안내원이라는 일에 만족하는 요한은 브뤼헐의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그가 느리면서도 섬세하게 들려주는 미술품들의 묘사는 어느새 주변 사물과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네덜란드의 화가 브뤼헐의 여러 작품들을 도슨트가 미술관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농부의 결혼식>, 1568, 빈 미술사 박물관

<농부의 결혼식> 속, 진녹색 천 앞에 앉아있는 신부 곁엔 신랑이 보이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오랜 전통에 따르면 결혼식 초반엔 신랑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죽 그릇을 분주히 나눠주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왼쪽 문 밖엔 굶주린 사람들도 보인다.


<월력도 연작 : 소떼의 귀가(10월 또는 11월)>, 1565, 빈 미술사 박물관

이 당시 풍경은 종교행사의 배경이나 상상으로만 그려졌기에 풍경화란 개념이 아예 없던 시대였다.
그러나 브뤼헐이 직접 여행을 다니며 풍경들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진정한 풍경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1559, 빈 미술사 박물관

브뤼헐은 환상과 실재가 혼합된 세계를 그렸는데,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그린 기록물이기도 하고 현실을 꼬집은 우화 혹은 풍자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자 했던 건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었다.

<성 바오로의 회심>, 1567, 빈 미술사 박물관

성서에 따르면 말을 타고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바오로는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 낙마한 체험을 계기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성 바오로의 회심> 중, 말에서 떨어지는 파란색의 남자가 바오로고 이 그림의 주인공일 테지만, 도슨트는 한가운데 빨간 옷을 입고 커다란 투구에 눌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꼬마에 주목하란다. 또한 성기가 다 드러난 두 마리 말의 커다란 엉덩이를 보란다.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1558경, 벨기에 왕립미술관

날개를 단 이카루스가 바다에 풍덩 빠져 허우적대고 있음에도 그에게 주목하는 이는 없다. 다들 묵묵히 자신의 일에 빠져 있는 무심한 모습들이어서 섬뜩하기까지 한다.


<갈보리 산으로 올라가는 행렬>, 1564, 빈 미술사 박물관

갈보리 산으로 십자가를 힘겹게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에게 주목하는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실의에 빠진 성모 마리아조차 자신의 슬픔에 푹 빠져 있는 상태다.

브뤼헐의 그림엔 이렇게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나는데, 과연 그림의 의도가 그 시대에서만 통했을까... 브뤼헐이 자신의 그림들은 위험하니 태워버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한 건 그래서 납득할만하다.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앤의 사촌은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지만, 남은 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것이 우리들의 일상 아니겠나...


농부는 '풍덩'하는 소리와 고독한 외침을 들었겠지만, 그건 그에게 대수로운 재난이 아니었다.
푸른 물속으로 사라져 가는 하얀 두 다리 위로 태양은 언제나처럼 빛났고,
한 소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을 호화 유람선은 평화로운 항해를 계속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 영국 시인 오든의 '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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