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사랑
이 영화가 개봉하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여러 사정으로 때를 놓쳤었다. 마침 미술로 인연이 된 분 덕에 시간을 내어 IPTV로 챙겨 보았다. 이미 좋은 리뷰들은 여러 곳에서 차고 넘치게 올라와 있으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한 줌 보탤까 한다.
화가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그저 의뢰받은 초상화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정확히만 그려주면 되었다. 단,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지 못하게 말이다. 마리안느는 훔쳐보며 관찰하고 기억에 의존해 그녀를 그려간다. 그건 18세기 여성 화가인 마리안느에겐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다. 그러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엘로이즈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으나 돌아온 건 냉소적인 평... 화가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비로소 엘로이즈는 자신을 제대로 보라며 모델을 자처한다.
바라보고 관찰한다는 것...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첫 번째 과정이다. 특히 인물화는 정을 쏟는 일이기도 하다. 종종 남성 화가와 여성 모델 사이에 스캔들이 생기지만, 성별을 떠나 모든 화가와 모델의 관계가 다 그렇진 않을 거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숨죽여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영원히 소유하는 것일까... 이미 끝을 알고 시작하는 사랑은 어리석은 것일까... 뒤따라오는 내 사랑을 확인하려다 영영 놓쳐버린 '오르페우스'처럼 평생 처절히 후회하고 슬퍼하기보다 서로를 사랑했던 매 순간을 기억하자고 맹세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한다. 비록 그림 스타일은 아버지를 빼닮았으나 주제(메시지)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나를 기억해요'라며 애틋하게 이별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 속 28페이지... 그렇게 둘은 서로를 잊지 않고 있음을 그림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캐롤>은 운명처럼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첫사랑의 아픔으로, <윤희에게>는 평생 그리워하던 사람과의 재회로 감상했었는데, 이 영화는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는 기억법인 '그림'에 빠져들어 살롱전 장면에서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오히려 퀴어영화에서 '사랑'이 명료하게 보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말이다... 여성들의 우정과 사랑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한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