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아주 이른 새벽에 눈을 뜨니 평소처럼 일찍 일어난 남편이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원래는 가까운 츠키지 시장에 같이 가서 이른 아침을 먹고 오자 했으나 내가 너무 곤히 자길래 혼자 가서 아침을 사 오려 한다는 거다. 나도 귀찮은 맘이 없지 않아 잘 다녀오라며 더 자고 말았다. 한참 후 봉지 가득 음식을 사 온 남편이 돌아왔고, 따끈한 미소시루에 곁들여 먹자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짐을 챙기며 TV를 보는데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라는 한국 아이돌 그룹이 아침 프로에 나와 노래를 하고 있었다. MC들도 얼마나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던지 자막에 한글까지 나와 나도 손을 놓고 봤다. 한국에 우호적인 현재 일본 분위기는 현지인들을 대할 때도 느낄 수 있었다.
체크아웃 후 “お世話になりました! (신세 많이 졌습니다)”란 인사를 건네며 호텔을 나섰다. 두 배로 늘어난 짐을 끌고 긴자선을 탄 후 아사쿠사 역에서 내려 코인 로커에 짐을 구겨 넣었다. 노후된 도쿄의 주요 전철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 남편은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고생했다. 도쿄나 뉴욕이나 파리나 짐을 끌고 다니다 보면 서울이 얼마나 쾌적한 도시인지를 깨닫게 된다.
11월 3일은 '문화의 날'이란 명목으로 일본은 휴일이어서 거리는 한산했으나 관광지는 이른 아침부터 붐비기 시작했다. 커다란 빨간 등이 걸려있는 '카미나리몬(雷門)' 주위도 그 사이 공사가 끝나 잘 정비되어 있었다.
맞은편에 생소한 건물이 생겨 있어 들어가 봤더니 '아사쿠사 문화 관광 센터'란다.
맨 꼭대기인 8층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 테라스'와 작은 카페가 있었다.
카미나리몬에서 센소지(浅草寺)까지 가게들이 길게 늘어선 '나카미세(仲見世)'가 한눈에 보였다.
스미다 강과 도쿄 스카이트리도 아주 가까이 잘 보였다. 밤 10시까지 운영된다고 하니 밤 풍경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소일 듯싶다.
6층의 다목적실에선 국립서양미술관이 2번의 도전 끝에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최근 신규로 등재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인 '가야 고분군'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문화 관광 센터와 카미나리몬 사이의 대로를 건너며 크게 보이는 도쿄 트리를 찍으니 건너는 주위 사람들도 함께 쳐다보며 감탄했다. 예전에 남편이 올라갔다며 사진을 보내왔었지만 긴 줄을 설 엄두가 나지 않아 대신 만족했다.
나카미세의 가게들을 눈으로 훑어보며 센소지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주 오래전 처음 방문했을 땐 물건들이 모두 신기해서 이것저것 담았었으나 이젠 싸구려로 보여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보는 눈이 달라진 건가...>.<
센소지 앞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들끓고 있었다.
거북이 등같이 생긴 '멜론 빵'으로 유명한 '화월당'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갓 나온 따끈한 빵을 그 자리에서 먹는 것도 여행의 참맛이다.
아사쿠사 속 작은 놀이공원인 '하나야시키(花やしき)' 앞에도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안에선 아이들이 즐겁게 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14년 전, 이 앞에서 찍은 내 모습을 찾아보곤 세월의 야속함도 느꼈다...ㅠㅠ
하나야시키 바로 옆에 있는 '아메야(あめ屋)'란 가게에서 따뜻한 감주를 마시며 둘러보는데 건물이 처음 본 듯했다. 알고 보니 12년 전에 생겼단다. 그동안 아사쿠사는 자주 왔었으나 여기까지 다시 와보지 않았던 탓에 못 알아봤었나 보다. 서울도 새롭게 계속 바뀌고 있는 터라 가봤던 곳이어도 다시 가보는 재미가 있다.
살짝 옆으로 비킨 히사고 토오리(ひさご通り)로 가니 너무나 한산했다. 이 거리에 있는 공연장인 '아사쿠사 쿠게키(浅草九劇)'에선 연극과 뮤지컬은 물론 사진전이 열린다.
걷다가 다방 같은 분위기의 작은 커피숍이 있어 무작정 들어갔다.
여기선 자리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어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땐 극장이나 버스 안, 심지어 강의 중에도 교수가 담배를 피워댔는데 비흡연가인 나의 고충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평소에도 남편이 집안이나 내 앞에선 되도록 담배를 피우지 않아 고맙지만 이날만큼은 특별히 봐줬다...ㅋㅋ
입구에 진열되어 있는 소품들도 아기자기하다.
'돈키호테'와 이어진 '브로드웨이 상점가' 대로에선 10대들의 스케이트보드 타기가 한창이었다.
인파를 헤치고 '마루고토 닛폰(まるごと日本)'이란 기념품 숍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 꼭대기로 올라가니 한국요리점인 '한마트'가 있었는데, 볕이 너무 뜨거워 사람들이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테라스도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유니클로를 잠시 들렀는데, 가방이나 티셔츠에 원하는 그림이나 사진을 프린트해 주는 독특한 서비스를 무료로 해주고 있었다. 나도 작은 토트 백을 골라 내가 그린 오일 파스텔 그림의 프린트를 요청했다. 점원 아가씨가 친절히 응대를 해줬는데, 얘는 내 아들이고 강아지는 2년 전에 16살로 떠나버렸다고 하니 아가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제 후 완성품이 나올 때까지 15분도 채 안 걸렸는데, 가방을 받아들면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감동 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가방이 탄생된 순간이었다.
뿌듯한 마음을 안고 돈키호테에서 아들에게 줄 일본 컵라면과 의약품(오로나인 연고)을 쓸어담고선 전통거리인 '덴보인거리(伝法院通り)'를 지나가는데, 대낮부터 술집마다 꽉꽉 들어찬 수많은 인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하루가 더 남았다면 우리도 동참했을 거다...ㅎㅎ
우마미치 대로까지 가고서야 숨을 돌리며 점심 먹을 식당을 찾아봤다. 마침 꽤 맛있어 보이는 생선구이집을 발견했다.
일반밥을 시켰음에도 밥그릇과 미소시루 국 크기가 오히려 한국스러워 상을 받자마자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럼 도대체 고봉밥인 '오-모리(大盛り)'는 얼마만큼이란 말인가으~~ 남편은 빨간 뽈락구이를, 나는 임연수 반 마리 구이를 코를 박고 맛있게 먹었다.
공항으로 갈 시간이 좀 남아 대로 건너편에 있는, 역 가게란 뜻의 '에키미세(駅店)'라는 쇼핑몰의 옥상 정원까지 올라갔다. 바로 눈앞에 도쿄 트리와 아사히 맥주 빌딩이 아주 잘 보였다. 이곳에도 ‘슛세이 이나리 신사(出世稲荷神社)’라는 작은 신사가 있었는데 장사와 영업의 신을 모시고 있었다.
코인 로커에서 짐을 빼고선 아사쿠사선을 타고 거의 1시간을 달려 나리타 공항에 내리니 2000엔대였던 PASCO의 잔액이 800엔대로 뚝 떨어졌고, 공항 면세점에서 탈탈 털어냈다.
또다시 연착된 비행기를 타고선 기내식으로 저녁을 먹었고, 자정 무렵에야 집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