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위 시누이는 나보다 9살 위다. 독일계 미국인과 결혼해 약 25년 전에 독일로 이민을 갔다. 내가 시집살이를 할 땐 시어머니가 몇 달간 독일로 여행을 다녀오시는 게 좋았다. 간간히 시누이도 한국에 다니러 오긴 했으나 어려서부터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 나도 달갑진 않았다. 그래도 내게 마음을 붙이려 했단 걸 안다. 그래서였을까 독일에서 부고가 날아왔을 때 몹시 미워하던 친언니를 잃은 느낌이 들었던 건...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등지시기 1년 전, 어릴 적부터 언니처럼 따르던 10살 위 막내 이모가 집안 화재로 변을 당했다. 응급실에서 막내 이모의 상태를 본 큰 이모가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뇌사로 한 달을 버티던 막내 이모도 결국 생사를 달리했다. 뇌졸증으로 식물인간 상태로 생을 이어온 막내 이모부와 큰 이모부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아버지에 이어 시누이까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독일로 날아간 게 나와 남편의 첫 유럽 방문이었다. 1주일간 시누이 집에 머물며 시누이의 남편도 돌봐줘야 했다. 그분도 몇 달 새 남동생과 아버지를 잃는 큰 슬픔에서 겨우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독일의 장례식은 너무나 적막했다. 시누이도 아버지처럼 갔기에 나는 차마 마지막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같이 간 막내 시이모의 손만 잡고 들려오는 어머니의 오열 소리에 눈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넉 달 후, 시누이의 남편이 고향인 미국으로 가기 전, 군입대를 앞둔 아들과 단 둘이 독일을 갔다. 에쎈에서 마침 아들이 관심 있어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겸사겸사 가기로 한 거다. 에쎈에서 퓌센을 거쳐 뮌헨까지 기차로 다닌 보름간의 자유 여행이었는데, 매사 비판적이던 내 마음과 눈이 정화된 듯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누이 남편을 만나 같이 간 뤼데스하임의 한적한 숲에서 남편이 보낸 카톡으로 '신해철'의 부고를 접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나는 남편한테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했다. 단, 유화만은 안 됐다. 시누이가 그림을 그리겠다며 집안에 유화 냄새를 풍겼던 싫은 기억이 남편의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수채화를 매우 좋아한다.
내가 한창 그림을 그리던 몇 년 후, 시누이가 내 꿈에 나타났다. 나는 그저 시누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줬다. 시누이의 얼굴이 매우 편안해지는 걸 지켜보다 목이 메이게 울면서 잠에서 깼다. 그냥 미안했나 보다. 생전에 내가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말이다.
그렇게 나는 그림을 그리게 됐고, 이렇게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내 삶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덕분에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잘 알게 되었다. 진짜로 원하는 걸 '언젠가'로만 미뤄 두지 말고 당장 해라... 돌아가신 분들이 내게 남긴 유언이었다...
시누이에 대해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내 남편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시누이와 남편은 남다른 유년기를 보냈기에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시누이가 독일에서 홀로 고통스러웠을 터다. 나는 그런 시누이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었다. 이제 나도 시누이의 나이가 되어간다. 이렇게나마 글로 풀어놓을 수 있어 다행이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