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로 원했던 것
누군가에게 드로잉은 예술이고 누군가에게는 결핍을 채워주는 취미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삶을 이어가기 위한 작업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나'를 찾고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일부일 수밖에 없고, 누군가의 그림을 평가하는 일은 그 그림뿐 아니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쁘고 화려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자신이 그렇게 보이고 싶다는 뜻이고, 소박하지만 진솔한 그림을 그린 이에게서는 꾸밈없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어차피 드로잉이 직업이 아닐 바에는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것이 좋다. 무엇을 그리건 드로잉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이고, 나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나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그래서 드로잉은 나를 성찰하게 만들고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도와준다.
그러나 모든 치유의 과정이 그렇듯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그림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쉽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기는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여행이 갖는 가장 큰 의미 또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성찰이 있다. 따라서 여행과 드로잉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두 가지를 함께 함으로써 효과 또한 배가 되지 않을까.
열정은 클수록 좋고 욕심은 낮출수록 좋다.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기 위한 노력과 나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그 노력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되어 줄 것이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그림보다는 스스로 재미있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자. 그렇게 그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을 괴롭히던 불안과 집착이 사라지고 살아 있다는 자존감이 당신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 줄 것이다.
- 김충원의 <이지 드로잉 노트 : 여행 그리기> 中 -
내가 그림을 왜 그리기 시작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거창하고 그럴듯한 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뭔가 나만의 것을 하고 싶다'에 도달했다. 어쩌면 내 자존감에 생채기가 난 탓일 거다. 그러니 자꾸 예전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했었는데라는 넋두리만 해댄 거다. 당장 자신 있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속상해하는 늙다리 중년이 다 되었단 뜻일 게다. 그림은 내가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 미개척 분야이고, 언젠가 하자고 품었던 히든카드이기도 했다.
뭔가를 배우려면 겸손이다. 나는 그걸 다시 시작하고 있는 거다. 내 마음속엔 멋진 풍경들이 떠도는데 막상 하얀 스케치북을 대하면 정말 머릿속이 하얘져 선조차 그릴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차근차근 모방을 한다. 그러면서 차츰 자신감도 회복됨을 작게나마 느낀다. 그리기 자유도가 높아지려면 수많은 습작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도 내가 많이 가진 건 '시간'뿐 아니겠나...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5년 전, 블로그에 올린 내 글이다. 한창 젊은 땐 수학을 가르치던 대학 강사였으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외동 아들에게 정서적인 문제가 생겨 일을 그만두게 된 케이스다. 나는 배움의 열정이 워낙 뜨거워 아이가 고학년이 되자 방송대에 편입해 교육학과 일본학 학위를 땄다. 잠시 상담활동과 번역을 하였으나 남은 건 마음의 상처뿐이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때 닥쳐온 일련의 가족들의 죽음은 내게 진짜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종용했다.
표지 그림은 '그라폴리오'에서 데뷔작으로 선정된 내 수채화 그림인데, 'who am I?'란 내 느낌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