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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Jan 12. 2020

호접지몽을 가장한 주접지몽

INTP가 건강하지 못할때

  지금으로부터 거의 백년전에 활동한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 선생이 팬에게 싸인을 해줄 때마다 반드시 써주었다는 글귀를 통해 동족인 나에게 메시지를 전해왔다.

うつし世はゆめ よるの夢こそまこと.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초등학교 교실만한 크기의 공간에 열 쌍 정도 되는 남녀커플들이 모여있다. 주로 이삼십대로 보이며 게중 사십대 정도로 보이는 커플도 있다. 장장 반나절에 걸친 여러가지 적성 검사와 인터뷰를 끝낸 후 다들 조금은 피곤하고 어떤 커플은 초초해보이며 어떤 커플은 살짝 흥분되어 보이는 커플도 있다. 우리 커플은 후자였다. 결혼 날짜를 정해놓고 최종관문인 '결혼최종허가'를 받으러 우리는 관할 기관에 와서 검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결혼허가식'은 국가차원에서 이혼율을 낮추고 행복한 가정을 양성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신생된 의무적 통과의례이다. 대다수가 '결혼합격'통지를 받기는 하지만 간혹 검사결과가 미흡한 경우 결혼 연기 명령이 떨어지기도 하고 아예 결혼 금지령을 받기도 하며 결혼 적정성 여부는 예비신랑과 예비신부의 조합에 따라서도 달라진다고 한다.

 허나 20대 중반의 우리는 당당했다. 젊은 나이, 좋은 대학 출신의 좋은 직장 초년생들, 비슷한 중산층의 집안 배경, 같은 종교 등등 뭐하나 걸리는 점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합격은 당연시 여겨졌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검사관이 교실로 들어왔다. 초조해하던 커플이 더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태연했다. 시험관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이 안가는 외모에 연령대도 웬지 종잡을 수가 없다.

 " 김철수&이영희, 이승복&체XX, 이 두 커플을 빼고는 모두 나가셔서 결혼허가서를 받고 집에 가시면 됩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두번째 호명된 한 쌍의 커플이 우리였기 때문이다.


 "김철수& 이영희 커플의 검사결과 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극히 사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이야기가 공개적으로 들려왔다. "예비신부님의 쇼핑중독증상이 꽤 심한편이라 두 분의 결혼은 3년안에 위기를 맞을 확률이 90%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가진 다른 자질의 조합이 워낙 긍정적이고 영희씨의 과소비만 고쳐진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6개월 후 재검을 받으시기를 권합니다. 재검사시에는 신부님의 6개월치 신용카드 명세서를 제출해주셔야 합니다." 영희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지만 차마 항의하지는 못한다. 예비 신랑의 표정은 실망한 듯, 안심한 듯 종잡을 수가 없다.


 " 잠시만요,.." 하고 문이 열리면서 이미 결혼허가를 받은,그러나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던 커플이 수줍은 듯 들어온다. " 죄송하지만, 저희가 정말 결혼해도 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까요? " 하고 30대 초반정도로 보이는 살짝 투박한 외모의 남자가 살짝 긴장된 목소리로 검사관에게 묻는다.

"한석봉&백평강 커플의 결혼예상점수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왜 그러시죠? "하고 검사관이 되묻는다.

한석봉씨가 머뭇머뭇하더니 입을 뗀다. "사실 저에게는 이 여자가 너무 과분합니다. 저는 이류대 출신에 집도 가난하고 직장에서도 SKY 출신들에게 치여 살고 있어요. 반면에 평강이는 스펙도 집안도 저보다 좋고 지금도 훨씬 좋은 혼처가 줄을 섰다고 합니다. 여자친구를 사랑해서 결혼하고는 싶지만 과연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제야 처음에 보았던 그의 초조한 기색이 내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사실," 하고 검사관이 운을 떼었다. " 결혼적정성 여부를 따질 때 결혼전의 조건이 가지는 배점은 별로 높지 않아요. 두 예비 배우자의 자질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될 수가 있습니다. 석봉씨는 현재는 비록 남들에 비해 앞서있지는 못하지만 근성이 좋아서 대기만성형의 자질이 있는데 평강씨가 그러한 자질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일조할 겁니다. 보통 ISFJ 라고 하는 자질의 소유자인데 대게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배우자로 주어집니다. 두 분 사이에서 출생할 자녀들도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요" 석봉씨의 얼굴이 그제야 환해졌다. 손을 꼭 잡고 나가는 두 연인의 뒷모습이 처음으로 부러우면서 동시에 우리 커플의 '뭔가 잘못된 '결과를 들을 생각에 괜시리 짜증이 났다.


  검사관은 우리 커플의 결과를 읊기 전에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두 분이 결혼허가가 나지 않은 이유는 여성분이 '결혼 부적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승복씨는 결혼 자질이 최상급이에요. 심지어  ISFJ 여성을 배우자로 맞을 자격 역시 충분하지만 본인의 자질이 워낙 좋아 웬만한 상대하고 모두 결혼이 가능합니다. 단 결혼 부적합자만 피하면 되요."


 "저도 6개월 뒤에 다시 올까요?" 하고 나는 짐짓 태연한 척 되물었다. "오실 필요 없습니다. 결혼 부적합자란 전 인류의 약 3%정도의 비율로 존재하고 여성은 더 희귀해서 1%정도입니다. 이러한 성향의 종자들은 애초에 종족번식에 지장이 없는 확률로만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결혼생활이라는 사회적제도와 의무에 적응하지 못해서 배우자와 자녀들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 제가 더 노력하면 되지 않나요?" 사랑스러운 나의 승복씨가 진지하게 반문한다.

 "남성분이 많이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결혼을 강행한다면 승복씨는 결혼전보다 오히려 더 외로워질 겁니다. 왜냐면 체씨같은 사람들은 깨어있는 동안 대부분을 유체이탈상태 또는 오직 자기 자신의 방에만 갇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배우자와 같은 시공간에 머물러도 그것은 온전히 함께 하는 것이 아닌 흡사 껍데기하고만 같이 있는 기분일 겁니다.
 때문에 당신은 힘들 때 배우자로부터 온전히 위로받지 못하고 중대한 의사결정에 따른 고민은 오로지 당신 몫이 될 것입니다. 결혼 부적합자는 선천적으로 사랑을 현실로 구체화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깐요." 

 검사관은 별안간 내 왼쪽 손목을 잡더니 스탬프를 찍었다. "걱정마세요. 이것은 낙인이 아니라 더 행복한 삶을 위한 표식입니다. 그리고 당신 눈에만 보이니 안심해도 되요. 당신이 행여 결혼하고 싶어질 적마다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내 왼쪽 손목에는 '결혼부적합자'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부디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왠만하면 연애나 동거에서 그치는게 좋을 겁니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검사관이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몇 년만의 고등학교 동창생 모임이다. 지금은 다들 넥타이 차림의 세파에 찌든 얼굴을 한 직장인들이지만 간만의 소싯적 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한창 옛날이야기에 신이 날 무렵 누군가의 핸드폰 벨소리에 맥이 끊긴다.

"여기 그냥 호프집이야. 고등학교 동창들이랑 왔어. 당신도 아는 애들이야. 그래.. 늦지 않게 갈께"

젊은 남편이 밖에서 여자들하고 어울리까봐 안절부절못하는 아내의 심문이 몇 번 이어지고 J는 연거푸 걸려오는 아내의 전화에 살짝 성가신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잠시 싸해진 분위기도 만회할 겸 모두들 민망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맥주잔을 부딪친다. 마침 금요일이기도 하고 다들 일찍 집에 갈 마음이 없다.

 그러다 이번에는 P의 전화벨이 울린다. "그래 알았어.. 당신도 내 걱정 말고 먼저 자" 겸연챦은 미소를 띄우며 P도 황급히 통화를 마무리한다. 살짝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몇차례 더 맥주잔을 기울인다.


 "이제는 다들 처자식이 생겨서는 술자리도 맘껏 못 갖는구나" 누군가가 초조한 듯 운을 띄우니 이미 수차례 아내의 귀가독촉전화를 받은 J가 기다렸다는 듯 바톤을 이어받는다  " 그래, 와이프들 난리나기 전에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는게 좋겠다들"

 승복씨는 웬지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뭔가 허전했다. 단지 친구들과 더 있고 싶은 마음 뿐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다가 P가 하는 마무리성 멘트에 그 허전함의 이유를 찾는다. "승복이는 좋겠다.와이프가 전화로 닥달하지도 않고..  "  그 한마디에 처음에는 옅은 우쭐함이 반짝했다가 금새 사라진다. 나도 아내로부터 그 '귀챦은 안부전화' 한 통 정도는 받고 집에 가고 싶다. 그러나 술자리를 더 끌어봤자 그 안부전화가 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 여편네는 이미 곯아떨어진 지 오래일 것이라는 것을 몇 년 동안의 경험에 의해 잘 알고 있다.


 '무관심과 방임'

 보통 낮은 애정도에서 '자유'라는 허울 아래 이루어지는 행동양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나 외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러나 항변하자면 나는 내 가족을 사랑한다.

 

 나는 현실세계에서 거의 넋이 나가 있다. 몽상과 현실이 뒤섞인 생활을 하다보면 슬프게도 내 가족에게 나의 사랑을 표현할 에너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기억하고 챙기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편이 좋아하는 예능프로그램이나 로맨틱 코미디를 나란히 앉아 같이 시청하는 일이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일 중 하나이다. 드라이브를 할 때나 식사를 할 때도 나는 저절로 유체이탈 상태가 되어 내 정신은 어딘가를 떠돈다.

 누군가는 엄마나 아내가 되면 본능처럼 행하는 일들, 예컨대 식구들에게 매일 같이 영양제를 챙겨준다든지 하는 업무는 내 의욕과는 다르게 내 머리 속에서 자꾸만 지워진다. 어떤 이들에게는 축복과 감사의 대상인 무탈한 일상이 내게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에나..이렇게 지루하고 귀챦은 일 투성이인 삶이라니....형벌을 당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몸이 묶여 건조가 끝난 지 3일 지난 세탁물을 노려만 보고 있거나 전기장판에서 부엌까지 가는 거리가 천 리처럼 멀기만 하다.

 그렇게 현실의 내게 남은 에너지는 고갈되어 만성적 게으름증을 일으켰다. 결혼 생활 중 크고 작은 일들을 나몰라라 하는 내게 지친 남편이 항의한다. 나는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는 빅픽쳐가 있는 여자라고 둘러 대지만 나는 숲을 넘어 우주를 보려고 하는 통에 정작 숲은 커녕 나무 한그루도 제대로 보지 못하며 빅픽쳐는 알고보면 사실 백지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미 수년전에 들통이 난 상태이다.  


 18년의 결혼생활 동안 내 안의 '우울기'는 점점 짙어져간다. 그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린 자의 자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소에 결혼 전에 궁합이나 사주가 아닌 결혼 적정성 여부를 판별하는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애초에 독신의 삶이 더 나았을 나같은 인간을 솎아내어 내 남편 같은 선의의 희생양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울이란 원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비롯 된다고 한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 노릇을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내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번지고 그것은 곧 슬픔으로 귀결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어떤 병을 중년의 남편이 진단받은 어느 날, 내 눈에만 보이는 왼쪽 손목의 스탬프가 유난히 짙게 보였다.

  '결혼 부적합자'

 나는 오늘도 나의 왼쪽 손목을 부질없이 빡빡 문질러 뭔가를 지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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