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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May 15. 2020

청국장 랩소디

청국장에서는 슬픈 맛이 난다.  

 나는 그녀가 창피했다.

햇볕에 검게 그을려 깊은 주름이 파인 두꺼운 피부, 거대한 젖가슴은 배까지 축 늘어져 있고 고목나무 둘레 같이 굵다란 허리에 힘겹게 걸쳐진 촌스러운 고무줄 바지, 한껏 부풀어있는 복부 비만에 비해 터무니 없이 가늘고 빈약한 다리, 우리집에 오신다고 일부러 미장원에 들러서는 분명 씨게 볶아달라고 했을 빠마머리를 헬멧처럼 쓰고 있는 그녀를 나는 '시골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녀의 촌스런 외양이나 징하디 징한 호남 사투리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시골할머니' 근처만 가도 풍겨오는 퀴퀴한 냄새였다. 당신한테서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도 모자라 구석에서 담배를 피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집에 제발 좀 안오셨음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가.아나. 퍼뜩 받어야” 하고 시골할머니가 바지춤에서 꺼내준 닳고 닳아서 얇아진 지폐는 눅눅하고 냄새가 났다.


 '시골할머니'는 내 엄마를 낳아주신 분이다.

내가 외할머니라고 부르는 할머니는 내 엄마를 '키워주신' 분이였는데 훨씬 세련되고 깔끔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아들을 얻기 위해 새로 들인 외할머니를 견디지 못해 시골할머니가 어린 두 딸을 버리고 재가를 하셨다는 사실은 내가 시골할머니를 마음껏 창피스러워해도 된다고 합리화 해주었다.


  어린나이에 생모에게 버림받은 우리 엄마와 이모는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의 엄마에게 어릴적 못했던 투정을 해대었다. 그들은 대놓고 그들의 엄마가 미워죽겠다고 했다. 항상 타인에게 친절하고 털털했던 우리 엄마는 유독 시골엄마 앞에서는 사춘기 소녀처럼 별 거 아닌 것에도 짜증내고 툴툴거렸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어린 것들 두고 제 살길 찾아갔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하필이면 지지리도 가난한 집으로 시집가서는 미련하게 자식새끼만 줄줄이 낳고 한창 나이에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고된 농사와 병수발 콤보로 점철된 그녀의 모진 인생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었다.


  시골할머니는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했고 어쩌다 우리집에 오셔서 같이 외출이라도 해야할 때에는 나는 일부러 시골할머니로부터 멀찌감찌 떨어져 걸었다. 혹시라도 학교 같은 반 아이가 나를 보는게 두려워서였다.




 우리집 냉동실에는 시골할머니를 닮은 청국장이 항상 있었다. 가뜩이나 정리정돈이 안된 냉동실 문을 열면 으레히 그 거무튀튀하고 못생긴 덩어리가 꼭 한두개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는 못마땅하게 그 덩어리를 집어 대충 아무대나 쳐박아놓고는 부라보콘을 꺼내 먹곤 했다. 그 덩어리를 잠깐 만졌을 뿐인데도 내 손에서 꼬리한 냄새가 나면 익숙한 짜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사우'가 좋아한다고 시골 할머니는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띄운 청국장을 우리집에 항상 떨어뜨리지 않으셨다. 그것이 나처럼 시골할머니에게 까칠했던 우리 아빠에게 그녀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장모노릇'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은 사흘이 멀다하고 청국장을 끓여먹었고 나는 청국장이 민폐음식이라는 것을 대학생이 되어서나 알 정도로 청국장 특유의 냄새에 무뎠더랬다.


  마찬가지로 우리 엄마는 고등학생인 나의 보온 도시락에 감히 청국장을 싸주실 정도의 만용을 부리셨다. 점심시간 이후 5교시 수업 시작하자마자 선생님이 "점심에 청국장 먹은 놈 나와" 하고 화를 내시는 걸 보고서야 이건 함부로 먹을 것이 못되나보다 하고 어렴풋이 감을 잡기 시작했을 정도였으니깐. 당시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던 한 친구는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그때 우리집에 오면 항상 꼬리한 냄새가 나서 괴로웠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청국장은 촌스런 시골할머니처럼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 음식이었다.  




 결혼을 하고 시부모님댁에 같이 살며 남편 가족의 식생활에 동참했다.

주로 한식이 주가 되는 것은 친정과 동일했으나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예컨데 시댁에서는 친정과는 달리 생선보다는 고기를 더 많이 먹는다거나, 젓갈 냄새가 나지 않는 시원한 김치를 선호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자주먹던 고등어 조림은 좀처럼 먹을 수가 없었고 대신에 홈쇼핑에서 구입한 노르웨이산 자반고등어가 자주 상에 올랐다. 그리고 모든 한국가정이 우리집처럼 청국장을 자주 먹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대신에 '나또'라는 음식을 시집 가서 처음으로 접해보았다. 나또를 처음 먹어본다고 하니 아버님께서 어떻게 먹는 건지 직접 시범을 보여주셨다.


" 이게 일본식 청국장같은 건데 이 간장소스를 뿌리고 젓가락으로 이렇게 휘저으면 콩들이 걸쭉하게 되면서 실이 생기지? 이게 몸에 좋은 거란다. 밥에 김싸서 조금 얹어 먹어봐. 맛있어"


 아버님의 자상한 시범에 따라 나도 나또를 먹었다. 얄밉도록 깔끔하고 세련되서 오히려 무슨 맛인지 모를 그런 무취의 음식이었다. 밥 잘 먹고 잠든 그날 밤 꿈에서 하필이면 한동안 먹지 못했던 청국장 찌개가 눈앞에서 보글거렸다.


  냄비 안에는 송송 썬 신김치와 가끔식 두부 조각이 떠있었다.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이상하게 내 숟가락은 걸쭉한 국물로 기꺼이 향한다. 가끔씩 투박하게 으깨진 콩 덩어리가 입 안에서 씹히는 질감이 싫지 않다. 일부러 숟가락을 냄비 깊숙히 부터 넣어서 건지면 운좋게 작게 썰은 돼지 고기도 건질 수 있다. 채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청국장 고명으로 들어간 청량고추와 송송 썬 파가 제법 향긋하다. 나는 대접에 담긴 흰 쌀밥에 새콤하게 무친 무생채를 두어 젓가락 넣고 청국장을 넣어 비빈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꿈 속에서 뭘 먹으면 아프다는데, 정말로 다음날 이상하게 몸이 아팠고 그 와중에도 다음에 친정에 가면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청국장 좀 가져와서 시어른께 맛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7년전, 이민 온 후 고국방문을 했을 때이다.

남동생 집에서 머무는데 올케가 세련되게 소분해놓은 식재료들로 빈틈이 없는 냉동실에서 낯익은 천덕꾸러기들이 눈에 띄었다.

  

" 야,이거 청국장이냐?"

"응 시골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신건데 와이프는 싫어해"

" 그지.. 어디 좋아하겠어? 그럼 내가 밴쿠버 갈 때 가져갈게. 먹지도 않는데 자리만 차지 하쟎아"

" 누나 거기서 먹다가 이웃들이 컴플레인 하면 어쩌려구. 나 시카고에서 유학할 때 한 번 끓여먹었다가

누가 신고해서 경찰도 왔었쟎아"

" 유난들 떠네. 걔네들 카레 냄새는 견딜만 하다니? 아무튼 내가 치워주면 냉동실이 훨씬 한갓져겠구만"


  나답지않게 촌스럽고 냄새나는 청국장 편을 든 것이 어딘지 쑥스러워 깔끔한 올케를 배려하는 사려깊은 시누이성 발언으로 마무리했다.

 

 물론 이곳 한인마트에서도 청국장을 판다.

그 청국장들은 동글동글 이쁘게 랩에 쌓여져 있고 얇게 썰은 청양고추가 보석처럼 장식되어있다. 그 이쁜 것들의 몸값은 비싸지만 내가 올케의 냉동실에서 발굴해 온 못난이들이 주는 깊은 맛이 없었다.

 바다건너 이곳까지 온 촌스럽고 못생긴 덩어리들은 대한민국 전라 남도의 토양과 햇빛으로 농사지은 콩들이 시골 할머니의 초라한 방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발효된 것들이었다. 여든살 고령의 시골할머니의 팔과 어깨는 그 많은 콩들을 으깨기에는 너무 노쇠해졌나 보다. 그 전보다 콩들이 알알이 살아 있었지만 어쩐지 곱게 으깨어진 마트 청국장보다 더 투박한 매력이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마지막 청국장을 먹으면서 나는 다음에 한국에 가면 이 놈들을 더 많이 가져와야겠다는 뻔뻔한 생각을 했다.



 

 사는게 바빠 7년 넘게 한국에 가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 가도 나는 그 청국장을 구할 수 없다. 따뜻한 구들장 아랫목도, 청국장을 따뜻하게 덮어주던 낡은 이불도, 솥뚜껑처럼 두껍고 거친 주름투성이 손도 3년 전에 그 주인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숨쉴 때 마다 가래가 끓어 가릉가릉 소리를 내던 시골할머니는 폐암 말기라 하셨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고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고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환대받지 못함에 익숙한 한 많은 삶을 오랜 세월 동안 콧구멍으로 뿜어내는 깊은 담배 한 모금으로 위안하던 그녀였다.


 엄마는 통화하시면서 나에게 "엄마가 없는 건 고향이 없어진 거랑 똑같다. 나는 이제 갈 곳이 없어"라고 하시며 엄마 잃은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우셨다. 나는 그 말이 100%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슬펐다.

시골 할머니의 자궁에서 만들어진 우리 엄마는 그러고 보면 시골할머니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시골할머니의 자궁은 곧 나의 뿌리였다. 그렇다면 나 또한 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영영 뿌리를 잃고 싶진 않다.

 문득 시골할머니 대신 내가 청국장을 만들어 엄마의 냉동실에 채워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로 언제부터인가 나는 청국장을 직접 띄운다.

인스턴트 팟으로 불린 콩을 삶고 요거트 기능으로 발효를 하거나 외갓집 아랫목 환경을 만들어보겠다고 식품 건조기를 이용하는 등 나름 현대적인 장비빨을 세운다. 약 만 하루가 넘게 발효가 된 콩들이 허여끼리하게 변하고 끈적한 실이 보이면 바실러스균이라하는 유익균이 생성된 것이다. 감자 으깨는 도구로 콩을 으깨고 굵은 천일염과 굵은 고추가루를 조금 넣어 섞는다. 자체 제작이 가능하니 헤프게 먹을 수 있도록 간은 쎄게 하지 않는다. 완성된 청국장은 한 번 먹을만큼씩 랩핑하여 냉동실에 넣으면 맘이 든든하다.


검은콩 청국장


  괜시리 주변의 몇 안되는 지인에게 내가 만든 청국장을 자주 나누어 주곤 한다.

 "부지런하네. 이런것도 만들어?"

하고 의례적인 인삿말을 하는 그들에게 나는 푼수같이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한국에서 살 때는 시골 외할머니가 직접 농사지으신 콩으로 청국장을 자주 만들어주셨더랬어서...

근데 외할머니가 꼬막무침도 진짜 맛있게 하셨었거든요. 혹시 꼬막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아세요?

.......암튼 그 생각이 나서 만들어봤어요”


 이렇게 나는 다시는 볼 수도, 더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를 애써 남들에게 나의 외할머니로 소개하고 뒤늦게 내 일상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고작 청국장 따위를 만들며 나는 뿌리를 잃지 않았노라고 억지스런 호기를 부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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