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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마음 Sep 27. 2024

스트레스를 원하시는 건가요?


올해  이른 봄날의 이야기


나의 독백


오늘은 허리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날, 모처럼 혼자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가서 사용해야 할 마스크도 넣었고, 지갑과 휴대폰, 미니보온병도 챙겼다. 

참, 워치도 챙겨야지.

오래 사용한 탓인지 배터리가 정말 빨리 사라지는데 오늘도 10% 이하면 어쩌나 싶어 확인을 했다. 

지난번 외출 시에 확인하지 않고 나갔다가 먹통이 되어버린 녀석을 발견하고 답답했던 하루를 보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싸, 50%. 충분하다. 이제 모든 준비는 갖췄으니 차량 운행정보를 확인한다. 13분 뒤 도착으로 나오니 지금 집을 나서면 5~6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배차 간격이 25분이라 한 번 놓치면 지루한 기다림을 맞이할 터라 성큼성큼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오늘은 정류소 앞 나무의자에 앉아 동네구경을 하며 버스를 기다릴 수 있으리라.

뚫려있는 상가 통로 사이로 버스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10초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그런데 헉!

다섯 걸음도 남지 않은 그곳에서 버스가 다음 정류장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뛰어가 보지만 이런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휑하니 가버렸다. 가끔 운행정보 속 꼬마 버스가 순식간에 세네 정류장을 점프해 집 앞 정류장에 떡하니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가 보다.

아쉬움에 나는 멀어져 가는 버스 꽁무니만 바라볼 뿐이었다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

버스가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신호대기 중이다.

버스는 곧 좌회전을 하여 사잇길로 접어들 것이고 세 곳의 정류장을 지나 다시 큰길로 나오게 된다.

내가 지름길로 뛰어간다면 어쩌면 큰길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뛰면서 생각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세 정거장을 둘러서 온다지만 평일이라 타고 내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내가 뛰어가는 방향도 지름길이라 조금 가까울 뿐이지 만만치 않은 거리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급기야 목구멍이 말라붙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가방  물병을 꺼낸다는 것은 나의 질주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제 저 코너만 돌면 나를 버리고 간 그 버스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자.


마침내 버스가, 바로 그 버스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빨간색 깜빡이를 켜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우! 내가 이 어려운 걸 해냈단 말이지?' 

하지만 기쁨은 찰나였다. 녀석이 보란 듯이 또 나를 두고 떠났다.


얼마나 지난 걸까?

저 멀리 내가 탈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쫓지 않고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렸다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편하게 앉아 왔을 그 버스가 말이다.

꽃샘추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땀범벅이 된 나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노곤한 몸을 창에 기대고 눈을 감으려던 나는 갑작스레 올라오는 분한 마음에 거칠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 워치의 스트레스 측정 버튼을 눌렀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스트레스 최상!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이 녀석 나의 스트레스를 모른 척하며 자신의 삼각형 손가락을 연둣빛 최저의 위치에 놓아두는 것이 아닌가?

'이럴 리가 없어.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한 번 더 측정을 시도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이 녀석 고장 난 거 아냐? 그래 삼세판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지만 녀석은 보란 듯 최저를 가리켰다.


스트레스 없다고 손가락질하며 알려주는 이 녀석이 지금의 나를 더 화나게 한다.


"나 오늘 너무 힘들었다고!"




워치의 독백


주인님이 나갈 준비를 한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나 싶어 마음이 설렌다.

오솔길을 따라 몸을 흔들며 내려가고 있는데 나는 너무 신이 나서 조직의 규칙을 어기고 주인님의 발걸음 를 2배로 늘려줄 뻔했다. 내가 마인드 컨트롤을 하지 않았다면 신뢰를 잃는 대형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순간 주인님이 버스정류장을 보시고는 뛰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지?

아.. 버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주인님은 실망하신 듯 잠시 고개를 떨구는 것 같더니 이내 버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주인님의 질주에 나 역시 풀가동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숫자를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나의 주인님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앗 저건 집 앞 정류장에서 주인님이 놓친 바로 그 버스가 아닌가? 그런데 그 버스가 또 주인님을 버려두고 가버렸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잠시 주인님의 눈치를 보았다.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으신 주인님이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더니 스트레스 측정버튼을 누르신다.

아. 다행이다. 결과가 최저로 나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결과를 보신 주인님이 또다시 버튼을 누르신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주인님은 다시 한번 더 측정 버튼을 누르신다.

"아니 주인님, 왜 이러시는 건데요? 결과는 최저라고요, 최저!"

그런데 갑자기 싸한 기운이 감돈다. 스트레스 최상이 나와야 끝날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주인님! 설마 스트레스를 원하시는 건 아니죠?"


알다가도 모를 우리 주인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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