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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마음 Dec 03. 2024

남편의 잠


새벽 한 시.

남편은 잠들었고 나는 깨어 있다.


첫 송년 모임에 참석했던 남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책을 읽고 있는 내게 자꾸 말을 시킨다.

10장 정도만 읽으면 한 권을 끝낼 수 있는 이 타이밍에 말이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고 호응을 해 주다가 그의 말에 마침표가 찍힌 순간 나는 

재빠르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먼저 자."라는 말을 함으로써 남편의 이야기는 반강제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남편은 언제나 그래왔듯 오늘도 3분 안에 잠이 든 것 같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이 옅게 들려온다.




남편은 언제 어디서든 자야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3분 이내에 잠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남편의 이런 모습에 화가 났었다.

함께 TV를 보다가 대화를 나누고픈 장면이 나와 말을 걸었는데 반응이 없어 쳐다보니 잠들어 있었다.

어느 장면까지 보고 잠이 든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다음날 물어보면 거의 시작하자마자 잠이 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어느 날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남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침대베개 뒤로 얼굴을 가리고는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도 기가 막혀 끌어안고 있는 베개를 잽싸게 빼내어 분노의 등짝 스매싱을 날렸는데 거위털 베개라 타격감이 없었는지 스르르 이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숙면에 빠졌다. 내 말을 어디까지 들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다음날로 이어질 말다툼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신혼 초의 일이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니 당연히 나는 남편이 이렇게 쉽게 잠이 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크게 다퉜던 그날, 다툼의 끝자락에서 화를 참지 못한 나는 남편이 말하는 도중에 방에서 나와버렸다. 거실을 빙빙 돌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가 났던 나는 슬리퍼를 신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에 화풀이라도 하듯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쾅하는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문을 닫았다. 그 행동에는 내가 화가 나서 집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리고픈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니 그 마음이 전부였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나오고 보니 딱히 갈 데가 없었다. 나는 아파트 단지를 서너 바퀴 반복해서 걷고 있었는데 걸음 수가 늘어날수록 나의 '화'가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집 앞 놀이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밤인 데다 많이 걸어서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작은 몸짓으로 그네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그네를 흔들고 있던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짧디 짧은 소설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쾅하고 닫히는 문 소리에 아내가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사실을 인지한 남편은 부리나케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는 동네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아내를 찾는다. 

달리면서 그는 후회를 한다. '내가 잘못했는데,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라고.

그렇게 애타게 아내를 찾아 헤매던 남편이 결국엔 아내 찾기에 실패하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 놀이터 그네의 작은 움직임이 시야에 들어온다. 설마 하며 가까이 다가간 그는 아내와 마주한다.

어색함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였지만 이내 아내를 일으켜 세우고는 격한 포옹을 한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다정한 목소리로 사과를 한다. 그 한마디로 모든 감정을 녹여버린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집으로 향한다. 


뭐 이런 상상을 했더랬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초겨울인 데다 밤인지라 그네를 잡고 있는 손도 시렸고, 감기에 걸리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밤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밥은 차려내는 나는, 다음날 아침 남편이 걸어오는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밥상을 차렸고 계속 말을 걸던 남편은 출근 시간에 쫓겨 집을 나섰다.

 (남편은 싸우고 난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네오는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집에 홀로 남겨진 나는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일을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말을 걸어오는 남편의 모습에도 화가 났고, 어젯밤 놀이터에서의 상상 때문이었는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화가 났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심각했던 모든 것들이 그 무게를 잃어간다.

우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남편에게 미소 띤 얼굴로 물어보았다.

"며칠 전 우리 크게 싸웠을 때, 내가 문 쾅 닫고 나갔던 날 말이야. 당신은 내가 걱정되지 않았어?"

나는 비록 남편이 나를 찾으러 나오진 않았지만 분명 집에서 걱정은 하고 있었으리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에 나는 기가 막혔다.

"자기 그날 밖에 나갔어?" "왜?"

그날 남편은 내가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기도 전에 이미 잠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나는 남편의 이런 모습이 참으로 싫었다.

대화하다 보면 잠들어 있고 싸우는 와중에도 잠이 드는 남편이니 좋을 리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머리만 대면 3분 이내로 잠이 드는 내 남편이 나는 참으로 좋다.

내년이면 60세가 되는 남편이 쉽게 잠들고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은, 현재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앞으로도 건강할 거라는 신호이니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가.


이제 나도 자러 들어가야겠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남편이지만 그래도 조심조심 까치발을 하고 들어가 보련다.



사진: Unsplash의 Jordan Whi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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