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 Immo Wegmann
나는 또다시 언니와 헤어져야만 했다.
언니가 처음 미국으로 떠나던 날, 언니가 탑승한 비행기가 하늘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돌아오던 길에도 나는 큰 슬픔에 빠졌었다.
하지만 미국 여행일정을 마무리하며 언니를 그곳에 남겨둔 채 떠나오던 그날의 슬픔은 이전의 슬픔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던 것 같다.
낯선 곳에 아이를 떼어놓고 오는 엄마의 마음과 같았다고나 할까?
얼마나 외로울지, 적응은 잘해나갈지, 향수병에 걸리는 건 아닌지, 수많은 걱정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공항까지 함께한 우리는 다가온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요즘이야 공항버스나 밴을 이용하니 집 앞에서 바이바이하고 밝게 웃으며 헤어지지만, 당시만 해도 공항배웅은 필수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뒤돌아 손 흔들기를 수차례 반복했던 우리 자매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에도 다시 한번 얼굴도장 찍고 격하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즐거운 여행이었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헤어짐은 언제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 자리는 기내 맨 앞 좌석이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이륙을 한 후에도 나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안전 관련 안내를 할 때 앞자리에 앉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었는지, 승무원이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조심스레 나에게 질문을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너무 우셔서 걱정이 된다며.
그 와중에도 우느라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나를 대신하여 곁에 있던 남편이 대답을 해주었다.
언니랑 헤어지는 게 마음 아파서 우는 거라고.
승무원은 그제야 안심을 하고 돌아가더니 잠시 후 내게 따뜻한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언니는 2년에 한 번씩 출장 오는 형부 일정에 맞춰 한국에 들어왔고 우리 집에서 한 달가량 머물다 갔다.
몇 년 동안 공항 마중과 공항 배웅을 반복했던 우리는 어느새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집 앞 마중과 배웅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는 형부의 출장이 1년 주기로 바뀌면서 우리 자매는 1년에 한 번은 꼭 만난다.
가끔 경조사가 있는 경우 1년에 두 차례 만날 때도 있다.
이제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우리 언제 보냐가 아니라 곧 또 보자 하며 쿨하게 헤어진다.
이럴 줄 알았다면 30년 전 그날 그리 울지 말걸 그랬다.
어느새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그 추석이 지나고 10월이 오면 또다시 언니네 가족 5인이 들이닥칠 것이다. (조카사위가 생겨 한 명이 늘었다.)
어디로 갈지, 무얼 먹을지, 카페는 어디가 좋을지 벌써부터 장소 물색 중이다.
집은 언제나 그랬듯 포화 상태가 될 것이고, 노화된 나의 정신과 육체는 과부하에 걸릴 것이다.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그 자리에서 나는 또 며칠 동안 예약된 몸살을 앓고 있겠지.
하지만 기다림과 함께하는 이 설렘이 나는 너무나도 좋다.
행복을 기다리는 행복의 순간이다.
나는 오늘 언니를 맞이할 첫 준비작업으로 염색을 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집어삼킨 까만 물결은 어느새 나를 추억의 바다로 데려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