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석을 비워놓아야 하는 이유
N-3번 자리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 있는 좌석 양 끝에 선명하게 눈에 띄는 분홍색이 있다. 좌석만 분홍색이 아니다. 그 아래 붙어있는 종이마저 형광 핑크색으로 무어라 글자가 적혀 있다. '핑크카펫,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렇다. 그 자리는 "임산부석"이다.
임산부석은 말 그대로 임산부를 위한 자리이다. 임산부는 노인, 장애인, 아동과 함께 교통 약자에 해당한다. 임산부의 경우 충격이나 자극에 취약하고, 개월 수가 흐를수록 신체적인 부분들이 약화되며, 거동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생명을 품는 10개월 동안 조심, 또 조심해야하는데 그렇다고 아무데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으며, 모두가 개인 자가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같이 택시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임산부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한다.
임산부석이 없던 시절 노약자석에 임산부가 앉으면 노인들로부터 폭언과 폭행 위협을 받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진짜 임신 한 게 맞느냐고 묻는 건 양반이고, 옷을 들춰보려 한다든가, 배를 찌르는 것으로 모자라 구타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는 표면만 보아도 폭행 및 강제 추행죄에 해당하며, 혹시라도 태아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부동의 낙태죄까지 해당된다. 태아를 지켜야 하는 임산부로서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기 힘들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이유로 인해 결국 '임산부 배려석'이 따로 생겨났다. 물론 이 배려석 자체에도 문제가 많긴 하다. 임산부 배려석의 문구는 결국 이 배려석이 몸이 무겁고 힘든 임산부를 위해서가 아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일의 주인공'을 위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의 사진처럼 "임산부를 위한 자리입니다"로 수정된 곳들도 있다.) 임산부=여성=분홍색이라는 사고 흐름도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대신 뭐, 강렬한 분홍색 덕분에 자리에 앉기 부담스럽게 만드는 효과는 있는 듯 싶다.
더 문제인 것은 임산부를 교통약자로 인정하지 않고, 마치 여성에게 주는 특혜인 것마냥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반석에 빈자리가 있어도 일부러 임산부석에 앉거나, 임산부석에 붙어있는 스티커에 매직으로 엑스 표시를 하는 등 치졸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또한 임산부석을 굳이 비워두어야 하는지, 주변에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면 되는 게 아닌지 묻는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임산부석도 노약자석과 마찬가지로 배려석이며, 임산부가 아니어도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하는 게 위법사항은 아니지만 비워두길 권장하는 쪽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유산의 위험성이 큰 초기 임산부의 경우 육안으로는 알아보기가 어렵기도 하고, 모든 임산부가 임산부 뱃지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리에 앉아있다가 임산부가 주변에 와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며, 이런저런 상황들을 고려하다보면 결국은 자리를 비워두는 게 맞다는 결론이다.
최근에는 아이폰에 있는 Air Drop(주변에 있는 다른 아이폰 이용자들에게 이미지를 전송하는 기능)을 통해 임산부석에 앉은 비임산부들을 저격하는 이미지를 보내기도 한다. 해당 자리를 비워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임산부석에 앉은 비임산부 승객들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당장 비임산부 승객을 일으킬 수 있을 수는 없어도, 차후에 그 자리에 앉기 전 망설이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기발한 발상이다.
우리는 웬만하면 지하철 내에 있는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다. 그 자리는 노인 및 장애인들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서도 같은 무게의 시각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임산부석에 대해 좀 더 제대로 인식하고 임산부석 자리에 곰인형을 나둔다거나, 혹시나 앉아있다가도 자리를 비켜줄 수 있도록 임산부 뱃지를 인식해 불빛이 들어오는 핑크라이트 등의 제도들이 시도되고 있다.
출퇴근 시간처럼 지하철에 사람이 가득차는 경우에는 빈 자리를 두는 게 쉽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한 배려석을 공석으로 두는 것이 우리가 임산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작은 배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