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20년부터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진단명은 기분부전장애(Persistent Depressive Disorder), 그리고 불안장애(Anxiety Disorder, unspecified). 미국에 와서도 의사를 찾아 약을 복용했다. 평생 먹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약에 대해 거부감도 없었다. 남자친구는 내가 약을 먹는 걸 아주 싫어한다. 그게 네 몸에 좋을 리가 없다고, 마음 같아서는 다 변기에 넣고 내리고 싶단다. 처음에는 왜 나를 이해 못 하는지 속상했다. 나를 마약 중독자 취급하는 것이 싫었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넷플릭스에 있는 다큐를 봤다.
내가 먹는 아티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벤조 계열 약물을 3년 넘게 복용하고 있었는데, 미국 주치의가 그 사실을 매우 염려했다. 너무 오래 복용했다고, 중단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끊었다. 남자친구가 집에서 자고 가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먹고 나면 기억이 끊기고 아침에도 몽롱한 것이 싫었다. 그렇게 10일을 약 없이 산 적도 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약을 덜 먹게 되었다. 주치의와 상담해 약을 다섯 개에서 두 개로 줄였다. 지금은 월요일만 약을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아예 먹지 않는 날도 있겠지. 미칠 것 같던 불안 증세도 사라졌다. 관계,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전처럼 연연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잘 풀리지 않는다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고 오직 나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단단해졌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작년만 해도 내가 약 없이 살 수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잠에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새벽에 깨도 야리와 메리가 내 옆에 있고 이 공간이 안전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미국에 오니 스트레스가 확연히 줄었다. 한국에서는 그리 생각지 못했던 금전적인 스트레스가 있지만,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는 아니기에. 1년 전만 해도 밤낮없이 일했었는데. 새벽 3시에 회의를 가고 주말에도 출근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5시 땡 하면 집에 가고 그 뒤는 다 내 시간이다. 퇴근하면 일 생각을 전혀 안 해도 되어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내년에 학교를 들어가 원하는 공부를 하며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귈 생각에 설렌다. 내 공간이 있고 차가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삶이 행복하다. 가진 것에 항상 감사하기. 가지지 못한 것에 안달하지 말기. 노력해도 내 것이 되지 않은 것들을 흘려보내기. 후회 없이 사랑하기. 그거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