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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Mar 22. 2023

고양이의 방탕함 <나의 고양이>

6

 캐시는 자수를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고 글을 배웠지만 키에르는 일하느라 학교에 거의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키에르는 뭔가 읽고 싶어 하고 적고 싶어 했다. 캐시는 자신이 배우고 있는 글이나 지식을 조금씩 알려줬고 그때부터 키에르는 무언갈 적고 있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성급하게 휘갈기고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쓰곤 했다. 부모님 몰래 농장에 갈 때마다 그는 캐시가 빌려준 몇 권의 책을 닳도록 읽고 있었다. 거칠어진 손과 때 묻은 옷들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단정하게 입으려고 노력했다. 단추가 떨어지지 않았고 잘못 끼워지지 않았고 몇 안 되는 자신의 물건과 옷을 반듯이 정돈하고 개어놓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면서 그저 할 일을 했다. 그러나 키에르는 캐시에게 단 한순간도 다정하지 않았다. 캐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그의 웃는 얼굴에 진심은 한순간도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그것뿐.  

 기숙학교의 저녁 수업이 끝난 후 간단하게 식사로 버터를 바른 부드러운 오트밀 빵과 비스킷을 조금 먹고 3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오일램프를 끄고 눈을 뜨면 깜깜한 어둠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키에르의 얼굴이 보인다. 혹은 또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 어디에 있을까. 캐시는 다정한 키에르, 다정하지 않은 키에르. 모든 키에르를 보고 싶다. 연락 할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그는 분명 무언갈 적고 있을 것이다. 캐시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며 나타날 것이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물리적인 행동으론 벗어날 수 없었다. 캐시는 아주 작은 머리에 작은 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비좁은 방에서 미치지 않고 견뎌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 없고 알려준다 한들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눈을 감고 생각을 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장소로 떠난다. 어떤 계획도 없고 어떤 이야기도 가지지 않은 채로 눈을 감는다. 나무로 된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유령처럼 밤을 걸어 다닌다. 시체처럼 누워 생각한다. 정해지지 않은 것들을 쓰는 키에르를 상상한다.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 먹지도 않은 음식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원하지 않은 일을 정해진 시간에 맞춰하는 건 구역질이 난다. 음식뿐만 아니라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쏟아져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캐시는 두통이 밀려왔고 눈물이 난다. 머리를 다 풀어헤치고 쥐어뜯는다. 양손에 뜯긴 머리카락을 쥐고 또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방 안엔 여전히 아무도 없다. 다시 오일램프를 켜고 그 불 위에 머리카락을 올린다. 방 안은 타는 냄새로 가득하다. 캐시는 그제야 모든 걸 끄고 정리하고 이불을 덮고 다시 눈을 감는다. 그렇다고 내일이 오길 기도하지 않는다.

 캐시에겐 고양이 한 마리가 있고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를 가진 고양이. 호박색 눈에 작은 얼굴과 길고 검은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 유난히 긴 꼬리로 고양이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양이는 몸을 길게 늘어뜨려 하품을 하고 야-옹하고 길게 울었다. 꼬리를 일자로 세우고 살랑살랑 흔들면서 캐시에게 다가와 머리를 비비고 유유히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원하는 걸 캐시가 가지고 있거나 누군가 가지고 있을 땐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손으로 낚아채거나 여러 번의 울음으로 달라고 보챘다. 원하는 걸 얻고 나서 부족하면 다시 머리를 비비고 몸을 베베 꼬면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기분이 좋을 땐 몸을 뒤집고 하얗고 통통한 배를 보여주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얀 배에도 까만 점 같은 무늬가 몇 개 있었다. 캐시는 그 점을 장난으로 살짝 누르곤 했다. 고양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손을 할퀴거나 물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고양이가 갑자기 나타난 손님 때문에 놀라서 뛰어가다가 발톱으로 캐시의 다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부모님에게 들키면 고양이를 버리라고 할까 봐 메이드에게 부탁해 간단하게 소독하고 연고만 발랐다. 고양이의 발톱자국이 그대로 다리에 남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죽을 때까지 남아있을 흉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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