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ED
DAY 10. 불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2)
삶은 실체 없는 불안이다. 존재하므로 불안하다. 존재하지 않으면 불안할 이유가 없다. 늘 그렇듯 절망적이지도 않은 희망적이지도 않은 ‘현재’에 머무르며 죽음을 꿈꾼다. 불안, 불안, 읊조리며 떠올려도 잡히는 건 없다. 살아본 적도 없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물에서 올라오지도 못한다. 발 딛고 살아야 할 땅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다.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내게 말을 걸고, 호의와 친절을 건네며, 뒤로 총과 칼을 같이 건네준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스스로의 몫이다.
융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나에게 아름답고 탐스러운 것이기는 했지만 불확실한 위험과 무의미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3) 라고. 나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실재하는, 물질적이고, 확실한 것들을 사고 모은다. 무엇이든 하려고 노력하지만 일시적인 해소만 가능하다. 무대 위에서 내가 아닌 나를 연기를 하며 거짓 위의 세워진 자아는 항상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를 나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건 지, 아닌 지 알 수가 없으므로, 매일 모래성을 쌓는다,
햇빛에 비치면 반짝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고, 파도가 들이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고, 온갖 물질로 오염될 수도 있고, 실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될 수 없다. 매번 선택하는 게 지겹고 지루하고 싫증 나고 역겹다. 스스로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게 싫다. 그럴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뻔하고 싫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서 모든 게 나에게 달려있다는, 그런 생각과 모든 것을 재고 따지고 판단하고 있는 다른 면의 나를 보는 게 싫다. 진짜 원하는 숨겨진 욕망 뒤에 있는 나를 알고 있는 게 싫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차라리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나도 모르게 잘 숨기던지.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하니 어정쩡한 사이에 끼어 불안만 높아진다. 아예 미쳐버리던지, 숨던지. 둘 중 하는 해야 되지 않나. 결정해야 되지 않나. 이렇게 사는 거 내가 원하는 거 아니지 않나.
강압적인 내가 또 다른 나에게 강요한다. 선택하라고, 너 이렇게 해야 한다고, 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니 몫은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렇게 하라고, 참아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혹은 말하라고 강요한다. 수동적인 나는 스스로와 싸우기 싫어서 타협한다. 맞는 말이니까 적당히 하자. 너무 힘들면 그 말을 듣지 말자. 내려놓자. 다짐하고 잊어버리려고 해도 신경 쓰이고 생각하게 된다. 옳은 일이 무엇인지 집착한다. 정해져 있는 루틴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맞다고 느낄 때마다 불안하다.
해야만 하는 강박에 시달리고, 그대로 행동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불안하다. 선택하는 상황을 마주하는 게 즐겁지 않다. 사는 것이 즐겁다고 느끼라고 강요받을 때도 있고, 우울하다고 강요받을 때도 있는 데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는 도망친다. 그리고 그 도망치는 방법은 정말 뻔하게 원인을 제거하는 것, 죽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할수록 좋다. 집중하게 되고 현실로 돌아오니까.
어떤 방법을 선택해서 어떻게 죽으면 될지. 사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러다 보면 정신이 돌아오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살아가게 된다. 그런 선택을 했을 때 어떤 후회가 남을지 알게 되니까. 그리고 결코 죽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생을 끌어모아 살고 싶다는 저 밑바닥에 숨어있는 삶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
사라지지 않는 불안은 환영처럼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고 공기처럼 주변을 맴돈다. 불안을 감지하므로 살아있다고 느낀다. 혼돈과 불안 속에 내가 있고, 독약이 될 수도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 사용법에 따라 다르겠지. 어떻게 다루는 가에 달려있겠지.
앞으로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삶에 남아있는 불안만큼 글을 쓰는 것.
브런치의 각주 기능을 찾지 못했으므로, 따로 달아둔다.
1)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된 프랑수아즈 사강이 한 말이다. 윤기가 흐르는 짧은 금발, 길고 가느다란 목, 약간은 소년 같으면서도 청순가련형의 곱상한 얼굴로 유명했던 사강도 이 무렵에는 이미 환갑이었다. 열아홉 살에 슬픔을 향해 발랄한 인사맘을 건넴으로써([슬픔이여 안녕])일약 스타덤에 오른 소녀 작가. 이후 청장년, 중년을 거치며 제법 많은 적품을 썼음에도 우리의 기억 속 그녀는 영원토록 ‘나를 파괴할 권리를’를 마음껏 유하는 청춘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네이버캐스트, 세계문학의 고전 일반, 소설가 김연경)
2) 1996년 도서출판 문학동네에서 발간된 김영하의 장편소설.
1996년도 제1회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자살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물론 주인공은 직접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그는 마치 화집에서 죽음에 관련된 그림을 바라보는 것처럼 죽음을 바라볼 뿐이고,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삶에 지친 이들을 잠시 도와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이 작품의 문제성은 죽음이라는 소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3) 분석심리학, C. G. 융의 인간심성론(1978), 이부영 지음,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