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름을 짜내다

by Dominic Cho

"기회를 위기로"는 메모리 사업부로 전배 받은 내 입장에서 서술한 글이었으니, "고름을 짜내다"에서는 반대로 LSI 인력을 충원받은 메모리 부서의 입장에서 살펴보려 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라고 성급했던 내 언행에 대한 부서원들의 날 선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관점에서 그림을 다시 려보자.

"소스 제품과 파스타 전문점"의 비유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파스타 전문점에서 그날그날 요리에 쓸 소스를 만드는 일은 소스 회사에서 매일 몇 만 병의 소스를 만드는 일과 본질은 같을 수 있어도 실제로는 정말 다른 일이다. 파스타 전문점에서는 토마토소스의 일종인 뽀모도로, 크림소스의 일종인 까르보나라, 오일 소스의 일종인 알리오 올리오 등등 다양한 소스를 그때그때 만들어서 쓴다. 짧게 말해 다품종 소량생산이다. 반면에 소스 회사는 소품종 대량생산과 유사하다. 그냥 토마토소스, 크림소스, 올리브 오일 같이 큰 범주의 몇 가지 제품들을 찍어낸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소스회사에서는 자동화된 기계나 분업화된 인력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반면에 파스타 전문점에서 그런 기계를 도입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손질, 배합, 조리 등에 전문화된 인력 도입 또한 낭비다. 차라리 요리사를 한 명 더 고용하는 편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메모리 제품이라는 "파스타" 중에서 디지털 회로 설계라는 "소스"의 기여도는 얼마일까? 애매하다. 물론, 소스를 잘 만들어야 파스타도 맛있지만, 파스타의 핵심은 결국 면이다. 때에 따라서는, 새우나 조개 등의 재료에 따라 아이덴티티가 정해지기도 한다. 소스는 잘 쳐줘봐야 주조연이다. 마찬가지로, 메모리 제품에서 핵심 재료는 결국 Flash나 DRAM과 같은 메모리 그 자체다. 반면에, 엑시노스라는 소스 제품에서 핵심은 디지털 회로 설계다. CPU, GPU 등 프로세서의 성능, 다시 말해 디지털 회로 설계 능력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메모리는 프로세서의 성능을 뒷받침하는 조연에 불과하다.




적고 보면 너무 당연한 이 큰 그림의 차이를 몰랐었다. "이걸 일일이 손으로 해요?"같은 망발을 지껄이기 전에, 한 메모리 부서원이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여기는 약간 가내수공업처럼 일해요." 게다가, 시간이 지나 알고 보니 부서가 예전에는 LSI에 속해있었지만, 메모리 사업부로 이동된 히스토리가 있었다. 즉, 이 사람들도 LSI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세상만사 다 그럴 이유가 있기에 그저 그렇게 돌아가는 지점을 굳이 내가 긁으면서 부스럼이 생겼다.


당연히 자동화 스크립트를 쓴다면 훨씬 더 빠르고 수월하게 회로 설계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 스크립트를 만들어서 배포하고 관리 및 유지보수까지 담당하는 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 스크립트에 특정 라이선스가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비용이 들고 그 라이선스 관리를 위한 업무들도 발생한다. 따라서, 번거롭지만 일일이 수작업으로 코드를 관리하는 편이 큰 그림에서 보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마치 "동백꽃 필 무렵"의 점순이가 "느 집엔 이거 없지?" 말하듯, 나도 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황이 받쳐주지 못해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괜한 생색을 낸 꼴이었음을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결국에 돈을 못 번다면, 자동화된 스크립트를 이용해서 빠르고 편하게 일할 수 있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대신 라이선스 비용과 인력을 줄여서 남은 돈으로 수익을 내고 인센티브로 뿌리거나 부서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메모리 부서에 오자마자 느꼈던 점이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사실이었다. 대형 모니터에 회색줄이 로로 있어도 회의실에서 그냥 쓰거나 노트나 볼펜 같은 사무용품마저 제한했던 전 부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그런 모니터는 찾아볼 수도 없고, 키보드와 마우스가 두 세트씩 준비된 회의실도 있었으며, 사무용품들은 부서 캐비닛에 넉넉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하나당 수 억 원씩 하는 라이선스 비용을 줄여서 이렇게 업무환경 개선에 쓰는 편이 결과적으로는 더 효율적 일지 모른다.


아마 회사도 그런 생각이었나 보다. 당장 비용 절감의 일환으로 LSI에서 인력을 줄이지 않았나? 그런데 그렇게 튕겨져 나온 떨거지 녀석이 자각도 못하고 "LSI에서는 다르게 일했었는데요?"라고 나불대는 꼴이라니, 정말 눈꼴사납다. 나 같았어도 그런 머저리에게 "왜? LSI에서는 이렇게 안 했어서 몰라?"라던가 "너 때문에 일이 진행이 안 돼요."라며 정신 차리라고 꿀밤을 멕이고 싶었겠다. 하지만, X신이 지가 X신인 걸 알면 X신이 아니다. 몇 번 일러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한 동료와의 면담에서 처지가 힘들다며 "똥차가 된 기분이에요" 이 지X을 하며 질질 울어댔다. 노답이다.




그래도 대기업이 좋은 점은 모자란 구성원에게도 몇 번의 기회는 준다는 점이다. 나였다면 그런 가망 없는 녀석은 그냥 버려 버리거나 따돌렸을 것이다.

"D님이 원해서 온 게 아니듯, D님을 원해서 받은 게 아니에요."라는 말처럼, 어차피 일해야 되니까, 일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니까, 이 천둥벌거숭이가 그래도 1인분은 해내야 나머지가 편하니까 어떻게든 고쳐서 써보겠다고 다들 노력하셨던 것 같다.


마음은 고맙지만, 난 눈치는 더럽게 없어도 염치는 있는 편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할 즈음에는 지금이 물러날 때임도 깨달았다. 만약 내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더라면, 당장 연차만큼 일처리는 못해도 몇 년 정도 인분을 싸지르다 1인분은 할 때까지 버팅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던 데다 뒤통수까지 씨게 맞은 터라 굳이 서로 힘들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꿈은 다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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