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위기로

by Dominic Cho

메모리 사업부는 새로운 환경이자 가능성, 그리고 기회였다. 하지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처럼, 준비되지 않았던 내게 온 것은 기회가 아닌 위기였다. 솔직해지자면, 사실 스스로 기회를 위기로 만들었다.

지금부터 이 실패를 자세히 되돌아보기 전에 미리 진통제를 좀 먹어둬야겠다. "시행착오"라는 약을. 이때의 아픔 덕분에 나중에 Ericsson에 취업할 때, "The Frist 90 days"라는 책을 해 보다 철저히 준비 수 있었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아직도 아린 추억을 떠올려보자.


어떻게 설명해야 그 상황을 읽는 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까? 이쪽 업계 사람이라면 다음 한 줄이면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ASIC designer"로 일하며 "Lint" 툴이나, "DFT", "Synthesis" 등의 업무는 유사했으나 담당 "IP"나 "Script", "Work flow" 등의 환경적인 차이에서 오해가 시작됐다.

아마 많은 분들은 '이게 뭔 소리야?' 싶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자세한 사례들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차례 설명했지만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퇴사할 때 면담했던 메모리 부서의 인사 담당자도 '네?' 하는 표정이었으니까.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 보자면, 난 다양한 "소스" 제품들을 만들어 파는 부서에서 "토마토소스"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뒤통수에 짱돌을 맞은 뒤 정신 차려보니, 같은 기업 산하의 "파스타 전문점"으로 전환 배치되었다.

첫 면담에서 나는 자신을 "토마토소스" 담당자였다고 소개했다. 러자 부서장은 "오! 토마토소스 만들기 쉽지 않은데 그 연차에 벌써 할 줄 알아요?"라며 들뜬 기대를 갖고 내게 파스타용 토마토소스 만드는 업무를 배정했다. 두루뭉술하게 경력을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이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업무 첫날, 내 눈앞에는 빨갛고 신선한 토마토 한 바구니와 "토마토소스 만들 줄 안댔죠? 만들어 보시죠!"라는 요청이 전달되었다. 그 순간 '아, 뭔가 한참 잘못됐구나' 직감했다. "소스" 부서에서 담당하던 "토마토소스" 업무는 매일 이미 소스용으로 잘 으깨진 토마토 1톤을 전달받아, 제품에 따라서 설탕이나 소금 등을 다양하게 배합한 뒤, 조리 부서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파스타 전문점"에서 말하는 "토마토소스" 만드는 일이 매일 꼭지도 떼지 않은 토마토 한 소쿠리를 씻어서 잘게 썰은 뒤 으깨기부터 시작해 파스타에 붓기만 하면 되도록 짧은 시간 안에 간을 맞추고 적당한 온도까지 조리하는 과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토마토 다듬을 줄은 모르는데요?"라는 대답과 함께 내 첫 단추는 그렇게 단단히 잘못 끼워졌다. 혹은, 그제야 내 첫 단추가 이미 단단히 끼워졌음을 알아차렸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토마토소스 만들었다면서 다듬을 줄을 몰라?"라는 경악과 함께, 나는 그렇게 허세충이 되었다.




"소스" 부서에서 어떻게 일했는지를 뒤늦게 설명하자 의심 반, 실망 반이 섞인 눈초리와 함께 "그래? 그럼 처음부터 알려 줄 테니까 잘 보고 배워"라는 식의 답을 들었다. 그렇게 쉴 틈 없이 두 번째 흑역사가 시작됐다.

"꼭지는 이렇게 떼고, 뽀득뽀득 소리 날 때까지 씻은 다음에 칼로 요래요래 썰고 으깨면 기본 손질 완료야. 이해했어?"

그냥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넘어가면 좋았을 일을, 꼴에 토마토 손질 담당자가 일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봤답시고 나는 경솔하게 주둥이를 놀렸다.

"아니, 여기는 토마토 손질을 일일이 손으로 해요? 저희 부서에는 손질 기계가 있어서 그냥 상자 까서 상태 체크한 담에 넣어주기만 하면 손질 끝나던데요?"

그렇게 나는 실력도 없는데 잘난 척까지 하는 싹수없는 놈이 되었다.


실제로는 이런 헛발질을 한 두 번도 아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되풀이했다. "LSI에서는 이렇게 했었는데요."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했었는지, 나중에는 내 멍한 표정을 보자마자 한 부서원이 "왜? LSI에서는 이렇게 안 했어서 몰라?"라며 따끔하게 핀잔을 줬었으니까. 게다가 눈치도 더럽게 없어서 어느 날 함께 일하던 다른 부서원이 부서장에게 쪼르르 다가가 하는 말을 파티션 너머로 듣고 나서야 미운털이 너무 많이 박혀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ㅇ님, D님이 x업무를 안 해서 일이 진행이 안 돼요."

x업무는 사소한 일로 그냥 내게 "이거 해줘요"라며 요청했다면 금방 마무리하고 건네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부서원이 내게 상냥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과 나는 동료이기보다는 고과를 놓고 싸우는 경쟁자였다. 당시 기준으로 CL2로 입사한 사원은 8년 내에 "가" 고과 한 번이나 "나"고과 두 번을 받는다면 9년 차에 다음 직급인 CL3로 진급할 수 있었다. 더 좋은 고과를 받는 다면 "발탁"이라는 제도를 통해 진급이 더 빨라질 수도, 일반 고과인 "다"만 받거나 재수 없게 "라"라도 받는다면 진급이 더 늦어질 수도 있었다. 역대급으로 신입사원이 많이 들어왔던 기수대였던 그들 입장에서는 석사 2년에 LSI 2년을 더해 5년 차로 뜬금없이 날아온 내가 달가웠을 리 없다.

그래서 그런가 전입 왔을 때, CL3인 분들이 넌지시 "저 기수대는 신입사원이 많아서 고과를 받기 힘들 수도 있어요"라는 말을 했었다. 이해력마저 떨어지는 난 현실로 닥치고 나서야 그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 순서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사고들이 벌어지고 일 년 정도 더 지나, 퇴사 일자를 기다리며 지인들을 만나 커피 한잔 하며 다양한 시각들을 접하고 나서였다. 내게 벌어졌던 지난 일 년 반의 일들을 여러 번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했지만, LSI에서만 일했던 지인들은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그러던 중, 하이닉스에서 일하다 삼성전자로 이직하셨던 한 분이 내가 몇 마디 떼자마자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듯 "~해서 ~하셨죠?"라며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알아맞히셨다. 놀라서 물어본 "어떻게 아세요?"란 말에, "하닉이나 삼성이나 메모리 부서 일하는 게 비슷해서 거기 분위기 대충 알아요."라고 답하셨다.

또 "LSI는 각자 자신만의 전문 분야가 있다는 게 참 인상적이에요"라고도 말하셨다. 이렇게 글을 적다 보니 그 말에 담긴 뜻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 메모리에서는 토마토소스 만드는 "과정 전반"을 담당한다면, LSI에서는 그중에서도 "손질, 배합, 조리, 포장" 등 각 과정을 전문적으로 담당한다는 의미셨나 보다.


부서 배치 당시에는 섣불리 저지른 실수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부서원들의 날카로운 말들과 행동들이 가슴에 비수로 날아와 남긴 상처들만 아팠다. '이 사람들이 텃세를 심하게 부린다'라는 원망에서 시작해, "고과"가 걸린 문제라는 상황을 인식하는 단계를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내 서툰 언행과 행동들이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을 깨달았다. 정말 말 그대로 내가 판 무덤이자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


시간이 흘러 스웨덴에 이민을 온 뒤 일 년 동안의 휴식기를 거치며,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고 그 점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만약 내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전 부서에선 이렇게 일했는데 여기는 이렇게 하네요"라는 둥의 겉 넘은 말이나, 자세한 설명 없이 자신을 "블록 담당자"라며 소개를 퉁 치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 덕분에 Ericsson interview에서 경력에 대해 자세하면서도 정확히 설명했고, 할 줄 아는 일에 대해 말하는 만큼 할 줄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명확히 언급했다. "The first 90 days"에서 읽었던 것 같은 글귀, "더 약속하고 덜 완수하기보다는 덜 약속하고 더 완수해라"를 따를 수 있었다.


메모리 부서에서의 적응 실패를 통해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실패가 그저 고통으로 남지 않도록 개선 방안들을 유도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과 책, 그리고 내게 주어졌던 시간적, 공간적 여유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

하나, 훈훈한 감사로 마무리짓기는 아직 이르다. 고통스러운 좌절들이 이어질 예정이고 지금은 상처를 더 깊이 째서 고름을 남김없이 짜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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