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의 상처

by Dominic Cho

S.LSI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끝을 고했다.

학창 시절 다녔던 영어학원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운명이 앞에서 날아오는 짱돌이라면, 숙명은 뒤에서 날아드는 짱돌이다."

내게는 LSI에서 메모리로의 이동이 숙명과도 같았다.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정해진 일. 숙명은 내 의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는 듯 그렇게 나를 뒤통수치고 유유히 가버렸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원망보다는 감사할 일이었다. 회사에서는 인사이동 명단에 포함된 직원들에게 한 달가량의 이동기간을 제공했다. LSI에서 하던 업무를 마무리하면서 메모리에 배치되기 전 잠시나마 휴식을 가지라는 회사 차원의 배려였다.

하지만, 상처받은 마음에는 감사보다는 원망이 들어찼다. 마음을 추스르며 새로운 부서에 대해 알아보면 좋았을 시간에, 그러기보단 내 뒤통수를 때린 짱돌이 어쩌다 어디서, 어떻게, 왜 나한테 날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만나 커피 한 잔씩 하며 회사 전반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


00~000명 단위의 사업부 간 전배라는 꽤나 자극적인 사건의 당사자였기에, 지인들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그러고 그들이 나름대로 알고 있던 이야기의 작은 조각들을 전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조각들은 다음과 같다. 이미 한두 달 전부터 전배 지원자를 받았다는 다른 팀, 전배의 근본적인 원인인 사업부의 적자 상황, 사업부마다 다른 분위기, 다른 사업부에서 메모리로 넘어간 사람들 등등.

그제야 알았다. 내 일만 열심히 해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내 일을 아무리 잘 해내도, 함께 하는 다른 부서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에 내 성과는 없다. 엑시노스 칩 하나를 만든다는 것은 몇 만 명이 달라붙어서 함께하는 극한의 조별과제였다.




그 조별과제가 하고 싶어서 S.LSI에 지원했다. 반도체 칩 설계, 그중에서도 우리나라가 잘하는 메모리 분야가 아니라 잘해야 하는 팹리스 설계 분야. 힘든 일이지만 그렇기에 도전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나와 같은 작은 점 하나가 모여서 결국엔 큰 일을 이뤄낼 수 있다고,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부서졌다. 치열했던 지난 2년의 보상은 '아저씨, 여기서 이러지 말고 딴 데 가세요'였다.


아마 오랫동안 꿈에 취해있었나 보다. 보다 정확히는 한 번도 깨어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인생의 경로를 틀어버린 이 숙명으로 인해, 가져왔던 세계관에 의심이 들었다. 열심히 일한다고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노력과 결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공정하지 않다.

만약 그랬더라면, 내가 전배 대상자로 선정되서는 아니 되었다. 나는 사업부 동기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축이었고, 벌써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 시작했으며, 배운 지식으로 다른 동료들을 돕기 시작했으니까.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 그룹에만 인원을 배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저연차 위주로 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학벌은 대상자 선정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당사자와의 조율 없이 멋대로 위에서 정해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놔두고 가기 싫은 사람을 보내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어느 사업부에서 적자가 났다며 흑자난 사업부로 특정 직군의 인원을 부품 갈아 끼우듯 이동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는 꿈에 눈이 멀어있었다.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당하기 전까지는 몰랐으니까. 회사는 가장 효율적으로 보이는 방식, 특히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동작한다. 따라서, 회사라는 조직에서 공정은 그렇게 효율적인 가치가 아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적자를 줄이고 흑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메모리 사업부에서 충원이 필요한 인력을 확인해서 LSI 사업부의 각 부서 별로 인원을 할당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부서에서는 이미 숙련된 고연차보다는 보내도 타격이 덜한 저연차로 정하는 편이 앞으로의 업무 진행에 도움이 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의사를 고려하는 것은 불필요한 시간과 자원의 낭비다. 법이나 규정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최소한의 절차만 지키면 될 뿐이다.




자연스럽게 회사에 반감이 생겼다. 나는 회사를 '꿈'으로 대했지만, 회사는 나를 '숫자'로 여긴다는 잔인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에 부닥쳤기 때문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내 문제다.

나는 살아오며 '대상이 줄 수 없는 가치를 제멋대로 기대'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끝에는 스스로 불러온 실망이 남았다. 이 또한 전적으로 내 문제다.

자신이 불러온 원망에 사로잡혀, 회사에 대한 알 수 없는 적개심으로 새로 다가올 미래를 망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 문제다.


회사생활을 마무리 한 끝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게 날아들었던 짱돌과 그에 관한 대응에 후회가 남는다. 결국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를 원망한다면, 모두를 원망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아무도 원망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내 원망이 향할 곳은 없었다.

불합리한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감사할 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불합리를 참고 30여 년을 회사생활하고 계시는구나. 어머니께서는 또 다른 불합리를 참고 30여 년 동안 나를 돌봐주셨구나. 누나는 더한 불합리도 겪어내고 있구나. 불합리함은 어디에나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불합리를 묵묵히 버텨내고 있다. 그저 겸허하게 감사할 것을...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바꿔보자." 다행인 점은 메모리 사업부에서 앞으로 겪을 시행착오가 그 변화에 도움이 되었다. 의사소통, 배려, 공감과 같은 소프트 스킬이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만큼, 혹은 상황에 따라서는 훨씬 더 중요함을 몸소 체험했다.

이것이 숙명이란 통수가 남긴 상처다. 세상은 공정하다. 그런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뜨거운 이상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오늘을 살아낼 힘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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