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놓다

by Dominic Cho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눈칫밥도 먹다 보니 맛을 알게 되었다. 놓으니까 편했다. 그즈음에 자리를 이동할 기회가 생겨서 일부러 남들과 떨어진 구석진 빈자리를 골랐다. 넓은 책상 두 개를 혼자 수 있어서 모니터도 세 대를 놓고 개인용품도 입맛대로 이곳저곳에 배치했다. 부서원들과 등 돌려 앉은자리라 다들 별 신경 쓰지 않아서 근무 시간만 채고 화장실 가듯 편하게 퇴근했다. 최소한 할 일은 했으니, 출근하고 싶을 때 출근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발적 왕따라고 할까? 분명히 나쁜 상황이었다. 그런데 뭘 하면 할수록 더 망가질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빼낼 만큼 빼낸 젠가 같았다.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뭔갈 하자니 와르르 무너질까 두려운, 그저 모르는 척 외면한다면 최소한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으니 당시에는 그 선택이 최선처럼 느껴졌다.




대신에 회사 밖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여행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아내 덕분에 중소기업 대표, 유튜버, 모델, 원어민 선생님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명한 식당들과 색다른 여행지들을 찾아가는 즐거움은 덤이었다. 맛난 음식들을 같이 먹으며 저마다 다양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이, 답답한 회사 생활에서 벗어나 눈 돌린 곳에 있었다. 거기에 더해지는 술 몇 잔이면 으레 당시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들부터 시작해 점점 깊어져가는 이야기보따리들이 풀려나왔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학업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평범한 궤적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주는 무게감이 있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휘발될 순간의 감정이나 머릿속 상상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삶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순간들을 담금질했고, 그렇게 제련된 독특한 가치관에서 얻은 경험들이 주는 울림이 있었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 몇 가지를 꼽자면, 우선 미군 친구의 NPC론이 생각난다. 짧게 말해, 누구나 자신만을 자유의지를 가진 플레이어라 여기고 다른 이들은 종의 NPC처럼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GTA 같은 오픈월드 게임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그리고 그가 꺼낸 그 이야기 뒤편에는 유년기부터 몸으로 겪어낸 인종차별,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았던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그런 제약 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주변인들과의 괴리감이 있었다.

컬트적 주장이나 음모론에 가까웠던 의견들도 생각난다. 사랑이 인류를 구하리라는 너무도 당연하면서 무력한 주장이나 결국 소수 지배층의 검은 손아귀에 다수 피지배층은 놀아날 뿐이라는 비관론도 있었다. 처음에 난 그들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성급하고, 섣부르고, 생각은 얕으면서도 올바름과 정답을 추구하는 내가 어떻게 회사 밖에서도 그렇지 않을 수 있었을까?


몇 달에 걸쳐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견문이 넓어지자,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행간 사이에 담긴 암시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들이 겪어낸 간과 환경을 짐작하게 되면서 그들이 펼치는 주장을 논리로 이해하는 단계 지나 감정에 감하는 단계를 처음 느꼈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볼 때만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앉은 사람의 말속에 담긴 그 뼈에 아로새겨진 아픔에 눈가가 시큰해지지도 했다. 그럴 땐 말없이 한잔 더 적시며,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내가 네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있음을, 그리고 너도 내가 아파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아픔을 위로하고 싶어져 내 아픔들도 하나 둘 꺼내놓았다. 이 사람이 내가 느꼈던 그 고통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해도, 나 또한 그가 가진 애환의 질감이 피부로 전해지진 않았더라도 가슴으로 울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내 이야기에 보인 반응들 중 무엇보다도 마음에 와닿은 말이 있다.

"결핍이 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세계 회고록"을 통해 아픔이 이미 전해졌음을 압니다.




다양한 시각을 접며 의도하진 않았지만 "고름을 짜내다"처럼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상상한다고 해서 아픔이 가시진 않았지만 '그럴 수 있지'하고 넘어 수 있었다.

되돌리기엔 메모리에서의 시간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어제는 여전히 아프고 새로운 생채기가 더해지는 오늘이었지만, 그 아픔이 고통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마치 매운 국물이나 뜨거운 탕에 들어가는 자극에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이치와 같다.


그렇게 일상을 놓았다. 순간의 실수들이 쌓여 몇 번의 좌절이 반복됐고 그렇게 한국을 포기했다. 나는 낙오자였고, 떨거지였으며, 눈치 없는 개노답이었다.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도 주고 또 많이 받았다.

그렇게 일상을 놓았다. 눈을 돌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시야를 넓혔으며 그렇게 스웨덴으로 나아갔다. 나는 실패를 돌아봤고, 바꿀 점을 찾았으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했다. 주변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내 아픔을 들려주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이 있었음을 매 순간마다 기억하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 또 까먹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하다 반성할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고 또 말없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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