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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nic Cho May 26. 2023

국립역사박물관 - 2. 1500~1700년대

우리에게 태조 이성계가 있다면, 스웨덴에는 구스타브 바사란 인물이 있다. 이 시기 칼마르 동맹 체제 하에서 덴마크 인들에 의해 스웨덴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처형된 스톡홀름 피바다가 발생한다. 우리로 치면 명성황후 시해와 비슷한데 단위가 훨씬 더 크다. 이로 인해 스웨덴 독립 전쟁이 발발하고 구스타브 바사가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는 새로운 왕조를 연 시조이기도 하면서 칼마르 동맹을 끝낸 찬탈자이기도 하다는 점이, 조선 왕조의 시조면서 고려 왕조를 끝낸 이성계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두 인물은 출신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스톡홀름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바사와 달리 이성계는 고조부가 몽고에 항복했고 아버지까지 원나라에서 관직을 지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조선족과 유사하다. 재미있는 점은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에서 독립하여 덴마크와 갈라서게 된 지점을 스톡홀름 출신의 구스타브 바사로 삼는다. 반면에 한국과 중국의 역사가 갈라진다고 여기는 지점은 원나라 출신인 이성계가 세운 조선보다도 훨씬 이전이다. (사실 고조선이란 시작지점부터 중국과 다르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0.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한 것처럼 역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 즉 '지역'과 '개념' 사이의 시각차가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다. 도대체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어느 지점부터 구분해야 할까? 분명 오늘날 우리가 한국인을 떠올리면 이 개념에는 중국인과 배타적인 정체성이 담겨 있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구분하는 편이 자연스럽지만 그 시작점은 어디가 좋을까?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가면, 아프리카의 루시던, 에덴동산의 아담이던 모든 인류는 공통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한 뿌리에서 시작했더라도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이 대목이 더욱 흥미로운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문제로 여기는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논란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연 고구려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일까? 중국의 역사일까? 혹은 중국의 역사이면서 한국의 역사일까? 또는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 어느 것도 아닐까? 고구려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 보면, 그들은 자신을 당나라 사람이 아니면서 신라 사람도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의 후손이라는 이들과 신라의 후손이라는 이들이 자신들을 두고 서로 자기네 선조라고 싸운다면 어떤 기분일까? (우리 집을 박살 낸 놈들의 자식들이 나보고 서로 조상님이라고 우기는 건에 관하여...)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 속에서 확실한 것은 현대의 지역을 기준으로 역사라는 모델을 조립할 경우, 그 톱니바퀴들이 현실의 문제를 놓고 서로 꽤나 자주 삐꺽 인다는 점이다.




*쉬어가기

그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왕부터 농민들까지 볼 수 있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그때의 왕이 먹었던 음식보다 맛있어 보인다. 그런 생각으로 이 사진을 한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오히려 농민들의 오트밀 식단이 오늘날에는 건강식이라고 드립을 친다.





내정을 마쳤으면,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스웨덴은 때마침 30년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빈자리를 휘젓는 북유럽의 패자(혹은 깡패국)가 된다. 힘을 갖게 되면 쓰고 싶어지나 보다. 오늘날 강대국에 걸맞은 위상을 차지하려는 중국도 그렇다. 다만, 주어진 능력보다 과욕을 부리게 되면, 역사는 언제나 알맞은 위치를 깨닫게 한다. 스웨덴도 예외는 아니다. 전쟁에서 진 뒤에야 스웨덴은 관심을 외부에서 내부로 돌리게 된다.



나도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민을 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나는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한국에서 경력을 쌓아가며, '나 정도면 괜찮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 자신을 문득 발견했다. 학벌도 나쁘지 않고, 누구나 아는 회사에서 괜찮은 연봉을 받았다. 처음 취업했을 무렵에는 '이 월급을 받을 만큼 능력이 되나?'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른 직군에 비해서 '인센티브'가 적다고 느꼈다. 그러다 다른 이들의 소식을 듣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면, 무의식적으로 연봉을 비교하며 같잖은 우월감에 빠지거나 괜한 열등감에 빠지기도 했다.


떠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쉬어 가기

그 당시에 잘 나가는 귀족이 입는 옷을 보면 뚱뚱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 먹고살았기에 뚱뚱함을 강조하는 옷이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에는 뚱뚱해지기 쉬워서 오히려 마른 체형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미'라는 개념은 어디까지가 개인적이고 어디서부터 집단적일까? 아마도 무지개의 스펙트럼처럼 모호할 저마다의 그 경계를 알아가는 것도 집단 속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재미 중에 하나다.





스웨덴은 이곳저곳에서 전쟁을 벌이다 얻어터진 뒤에야 18세기에 들어서 전쟁에서 과학으로 눈을 돌린다. 과학사를 읽다 보면 가끔씩 스웨덴 출신들이 있는데, 이 시기의 인물들인 경우가 많다. 이때 바닐라와 커피 같은 새로운 식재료도 무역으로 들어와 사람들의 식탁을 밝힌다. 그와 함께 자리한 문화의 한편에는 흑인 노예라는 어둠이 든다.



30년을 살아보니 난,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소인배에다 기억력은 짧아서 개구리 올챙이 적은 금방 까먹고 우쭐해한다. 잘 될 때는 기고만장하다 실수 하나 하면 또 금세 풀이 죽는다. 어린 시절엔 대단한 위인이 될 소질이 있다고 여겼지만, 자라고 보니 그냥 그저 그런 발에 채고 차이는 사람일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또다시 비교하고 자만에 빠지는 나를 보면서 결국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겸손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스웨덴에 왔다. 언어가 달라 버스에 뜬 운행 종료 표시도 읽지 못하고, 주문도 받을 수 없어 알바로도 일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다 같이 웃고 떠들 때 이해하지도 못한 채 멍청이처럼 실실 웃고 있는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그래도 웃을 수 있어서 좋다. 연봉을 비교하지 않고, 직장을 견주지 않고, 나이를 따지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그래서 왜 그 직업을 선택했는지' 물어볼 수 있고 그에 대한 개인적이고 사적인 솔직한 답을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이 질문에 저마다의 이유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오기 전에는 왠지 모르게 저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고, 드물게 꺼낸 순간에도 본인의 생각이 담담하게 담긴 대답을 들은 적은 더더욱 손에 꼽았다.


그래, 나는 이게 좋다. 이런 사람들이 좋아서 왔다. 영상편집 학교를 나오고도 차가 좋아서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는 친구의 얘기에 '시간 낭비 그만하고 빨리 전공 살려서 취업해라'라고 속으로 판단하던 시야가 좁은 이도, 함께 차를 끓이고 마실 때마다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와 반짝거리는 눈빛과 함께 재잘대는 이야기를 몇 주 동안이나 듣다 보면 자신의 시각이 얼마나 고루한지 깨닫는 법이다.

렇게 살고 싶다. 겸손하게 듣고, 들은 바를 정리하고, 정리한 생각을 나누면서 쓰레기 같은 나도 큰 일을 하고 싶다. "이를 두고 쓰레기 통()이라 부르지, 쓰레기 불통(不通)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Just because you're trash doesn't mean you can't do great things. It's called garbage can, not garbage cannot.” ― Anonymous)





이번 글에서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국가라는 개념이 대두되고 이에 따라 외부로 이어진 팽창이 과학이라는 내부로 변화되는 흐름을 살펴봤다. 이를 각각 우리의 역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으로도,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미시적 관점으로도 살펴봤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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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3 원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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