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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nic Cho Jun 23. 2023

니체의 삶 - 수 프리도

라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

총점: 9/10


- 한 줄 서평


니체의 삶을 통해 영원회귀와 위버멘쉬라는 그의 철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 내용 정리


진지한 책이므로 궁서체를 쓴다.

22개의 장과 잠언 모음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시간 순으로 니체의 삶을 다루며, 니체의 사상이 어떤 삶을 거치며 발전했는지 설명한다.


1장. 음악의 밤
2장. 독일의 아테네
3장. 네 자신이 되어라.
4장. 낙소스섬
5장. 비극의 탄생
6장. 포이즌 코티지
7장. 개념의 지진
8장. 마지막 제자와 첫 제자
9장.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롭지 못한 영혼
10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1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12장. 철학과 에로스
13장. 철학자의 제자
14장. 아버지인 바그너가 죽고, 아들인 차라투스트라가 태어났다.
15장. 무덤이 있어야 부활도 있다.
16장. 그가 나를 덮쳤다!
17장. 허공에 외치다.
18장. 라마랜드
19장.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20장. 토리노의 황혼
21장. 미노타우로스 동굴
22장. 무지한 점거자
니체의 잠언 모음



- 생각에 잠기게 만든 문장들


국가는 아주 뛰어난 개인을 원하지 않는다, 커다란 기계에 들어가는 하나의 부속품을 원할 뿐이다, 비판 의식 없이 묵묵히 국가의 요구를 따를 수 있을 정도로만 교육받은 사람을 원하며, 따라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 영원히 남게 되는 암담한 결과를 낳는다는 내용이었다. (168p)


바그너가 몹시 괴로워하며 니체를 찾아왔다. 그는 니체가 책에 대한 비평가들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사실 그에겐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인생이 달린 문제였다. (169p)


노예 계층을 필수적 존재로 보는 끔찍한 사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문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간을 영원히 갉아먹는 독수리가 아닐까? (188p)


'반시대적'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unzeitgemasse'는 니체에게 원래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과거나 미래를 벗어나 시간 너머에서 서는 것을 의미했다. (194p)


바그너는 니체가 진짜 세상으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자 놀음은 이제 끝내야 했다. (204p)


국가는 사람들이 교회를 우상숭배 하듯 우상숭배 해주기를 바란다. (220p)


자신도 잠언을 만들기를 좋아해 '교육은 우리의 인격이 아닌 행동을 바꾼다.' '종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도덕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와 같은 훌륭한 말들을 남겼다. (266p)


상위 동물인 인간은 거짓말을 듣고 싶어 한다. (284p)


과학은 확실성을 보장해 종교의 지위로 승격했다. 영혼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인간은 종교와 과학, 이상을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285p)


몇 줄만 빼고 모든 내용은 산책 중에 나왔다네. (291p)  /  ("움직임의 힘"?)


이 세계는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 있든지 간에 그것에 도달했을 것이고, 한 번이 아니라 수없이 도달했을 것이다. 이 순간을 붙들어라. 왜냐하면, 이 순간은 이미 몇 번이고 존재했고, 지금처럼 배분된 모든 힘을 다해 지금의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간은 태어난 순간과 아이였던 순간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313p)  /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우리가 신을 죽였다. (중략) 이 행위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가? 그럴 만했음을 보이려면 우리가 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46p)


적어도 인간은 대화와 사고가 가능한, 동물보다는 우월한 존재여야 했다. (361p)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려면 영원 회귀론을 사랑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중략) 이성이 있는 인간은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를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이 순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362p)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신이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를 원한다.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겠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존재다." (377p)


사람은 새로운 편견에 빠지기 위해서만 기존의 편견을 버린다고 말했다. (409p)


그는 <<차라투스트라>> 에서 자신의 철학에 담긴 핵심 주제를 발전시켰다. 영원 회귀와 자기 극복에 대해 말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걸 방해받는다면 격렬하게 타올라 위버멘쉬가 되라고 말한다. (중략) 그는 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회의론과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인물이며, 종교에서 벗어난 자유로 자신의 삶을 더 강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423p)


인간이 신의 실패작인가? 신이 인간의 실패작인가? (496p)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자신의 신조가 '운명애 amor fati'라고 말할 때 분명 진심이었을 것이다. (516p)



- 궁금한 점  


1. 니체의 책은 단언적인 문체로 쓰였다. 그런데, 직접 만날 때의 그는 아주 사려 깊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책이 유명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또한, 그렇기에 유명해진 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을 수 있었을까?

 만약에 반대로 그가 사려 깊고 자세한 문체로 글을 썼다면 그의 글은 좀 더 일찍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또한, 그것이 그를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라서는데 장애물이 되었을까?

혹은 사실 둘 다 틀린 가정이고, 애초부터 문체는 그의 유명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2. 책은 과학이나 종교와 같은 믿음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에서 머무른다. 그러나 과학이나 종교가 전반적인 삶의 질을 향상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믿음의 힘이다. 그렇기에 사랑과 함께 믿음의 긍정적인 면도 함께 다뤄주었으면 어땠을지 고민해 본다. 저자가 믿음의 긍정적인 면을 뺀 이유는 주제의 통일성을 해쳐서일까?



- 반성한 점


1. 170p에서 니체는 비스마르크에게 교육 분야에서 수상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개혁안을 제안하고, 그의 불명예를 보여주려고 했다.

 틀렸음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를 몰랐던 니체의 모습에서, 비판과 조언을 통해 타인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의 과거가 떠올라 반성했다.


 "운명의 과학"을 읽기 전, 나는 "Everyone can be anything"을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유전이라는 명백한 제약을 받기에 모두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책에서 변화라는 것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기에,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남에게 비판이나 조언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볼 때 드는 짜증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유머러스한 농담?


  

2. 과학이라는 천국은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만큼 불가피한 거짓이었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종교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과학에도 마찬가지였다. (201p)


 책의 내용처럼, 과학이나 종교와 같은 믿음은 진리일 수 없다. 사실 진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믿음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남을 비판하고 조언했던 내 과거를 다시 한번 반성한다.


 "영양의 비밀"의 저자 프레드 프로벤자는 반복되는 믿음의 끝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결국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마저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멋대로 비판하고 조언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듯, 유전의 한계라는 안식에 머무르며 변화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428p)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열광적으로 환호하지만, 정말로 원하는 것은 그 이론을 뒤집는 것이다. (442p)


 니체처럼,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진 "위버멘쉬"가 되도록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비판 대신 공감으로, 조언 대신 질문으로 모두가 진정한 자신을 찾아낼 수 있게 돕고 싶다.



3. 그러나 사람에게서 안식을 찾으려고 하지 말자.


 니체에게 삼위일체라는 "그 행위는 이른바 자유로운 영혼으로 구성된, 심지어 세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단위의 인간관계에서도 감정과 분노, 의무라는 새로운 사슬로 서로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어떤 애착도 새로운 멀미의 사슬을 불러왔다." (366p)


 애착이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결국 새로운 멀미의 사슬을 불러왔다. 내가 생각한 사랑짜증이라는 멀미를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확고하게 독립하려면 어떤 일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445p)


 그렇기에 니체처럼, 진정한 사랑에서 집착을 빼자. 대신에 긍정하는 마음을 넣자.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짜증 내지 말고 긍정적인 농담을 던지자.

 "생각풀 뜯길 좋아하는 양, 또다시 등장이오."

 어설픈 농담이 짜증 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 라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 자라온 환경,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가장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남자였다면 상황이 아주 달랐겠지만, 독일에서는 19세기말까지 여자아이들을 위한 김나지움이 없었다. 니체가 술포르타에서 진실과 자아를 찾아 철저히 사상의 세계를 배회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어린 숙녀들을 위한 교육 기관인 '프로일라인 파라스키'에서 정확히 정반대의 것을 주입받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소녀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타고난 개성을 죽이고 인위적인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결혼하기에 완벽한 요조숙녀로 탈바꿈시켜서 미래의 남편이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 지배하든 그저 받아들일 수 있는 백지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213p)


 엘리자베스는 니체에게서 "라마"로 불렸다. 총명한 여성이었기에 니체는 그녀에게 독립적인 사고를 권하려 애썼다. 하지만, 국가가 아주 뛰어난 개인을 원하지 않듯, 시대는 그녀에게 순종적인 여성을 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여성성을 즐겼다.


 무기력하고 무지하게 사는 삶에 만족했고, 이를 자신의 행동과 믿음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는 핑계로 삼았다. (216p)  

 엘리자베스가 이야기를 꾸며내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273p)

 엘리자베스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사회와 관습에 묶어두는 모든 족쇄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293p)


 무지한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시대의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그렇다를 넘어서 그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20년의 한국은 대입이라는, 직장이라는, 결혼이라는, 출산과 육아라는 틀에 맞춰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길 권장하는 사회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라마"에게 위버멘쉬가 되기를 권장하지 않는 사회와 그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한 "라마"의 결말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그너 협회의 인맥을 이용해 독일 전역에 인종 차별의 목소리를 퍼뜨렸다. (425p)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 (599p)

 그녀는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오빠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자신이었다고 믿으며 행복하게 죽었다. (605p)


 그 사회는 인종 차별과 나치즘에 물들었고 "라마"는 그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다면 왜 니체의 사상은 독일과 라마를 바꾸지 못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귀족적 급진주의"에서 찾고 싶다.


 귀족적 급진주의라니! (중략) 그가 해준 말들은 그동안 들은 말 중에서 자신에 관한 가장 예리한 평가였다. (480p)

 그녀의 회고록에는 니체가 혈통보다 사고가 더 귀족적인 엘리트로 묘사되어 있다. (492p)


 귀족적 급진주의, 다시 말해 엘리트주의는 라마에게, 대중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기에 니체의 사상은 독일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나치즘 선전에 이용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가까워질수록 니체주의는 호전적 형태로 변모했다. 힘에의 의지는 폭력과 무자비함을 인정하는 도덕적 지침으로, 위버멘쉬는 위대한 야수성으로, 금발의 짐승은 인종 개량 프로젝트에 대한 동기로 그려졌다.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전쟁을 좋아했다는 식의 기사를 내서 이런 왜곡된 해석을 더욱 부추겼다. (598p)



 대중의 소외라는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주의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위 20%가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파레토 법칙을 고려할 때, 특권 계층이 대부분의 열매를 차지하는 엘리트주의는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족적 급진주의 / 엘리트주의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이제 남은 과제는 철저히 현대인의 몫이다. 그가 답을 주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답이 있다면 그 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고,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도 우리가 직접 찾아야 한다. 그것이 위버멘쉬를 이뤄내는 진정한 길이다. (608p)


 내 답은 간단하다. 모든 사람이 엘리트가 되면 된다.

 방법은? 축을 늘리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철학을 못해도 꾸며내기를 잘하면 된다. 즉,


 1. 새로운 분야를 계속해서 발견해야 한다.

 2. 각 분야에서 위버멘쉬가 될 수 있게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소통을 통해 위버멘쉬들이 협업하여, 인류가 당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요구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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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원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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