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
총점: 9/10
- 한 줄 서평
니체의 삶을 통해 영원회귀와 위버멘쉬라는 그의 철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 내용 정리
진지한 책이므로 궁서체를 쓴다.
22개의 장과 잠언 모음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시간 순으로 니체의 삶을 다루며, 니체의 사상이 어떤 삶을 거치며 발전했는지 설명한다.
1장. 음악의 밤
2장. 독일의 아테네
3장. 네 자신이 되어라.
4장. 낙소스섬
5장. 비극의 탄생
6장. 포이즌 코티지
7장. 개념의 지진
8장. 마지막 제자와 첫 제자
9장.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롭지 못한 영혼
10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1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12장. 철학과 에로스
13장. 철학자의 제자
14장. 아버지인 바그너가 죽고, 아들인 차라투스트라가 태어났다.
15장. 무덤이 있어야 부활도 있다.
16장. 그가 나를 덮쳤다!
17장. 허공에 외치다.
18장. 라마랜드
19장.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20장. 토리노의 황혼
21장. 미노타우로스 동굴
22장. 무지한 점거자
니체의 잠언 모음
- 궁금한 점
1. 니체의 책은 단언적인 문체로 쓰였다. 그런데, 직접 만날 때의 그는 아주 사려 깊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책이 유명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또한, 그렇기에 유명해진 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을 수 있었을까?
만약에 반대로 그가 사려 깊고 자세한 문체로 글을 썼다면 그의 글은 좀 더 일찍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또한, 그것이 그를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라서는데 장애물이 되었을까?
혹은 사실 둘 다 틀린 가정이고, 애초부터 문체는 그의 유명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2. 책은 과학이나 종교와 같은 믿음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에서 머무른다. 그러나 과학이나 종교가 전반적인 삶의 질을 향상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믿음의 힘이다. 그렇기에 사랑과 함께 믿음의 긍정적인 면도 함께 다뤄주었으면 어땠을지 고민해 본다. 저자가 믿음의 긍정적인 면을 뺀 이유는 주제의 통일성을 해쳐서일까?
- 반성한 점
1. 170p에서 니체는 비스마르크에게 교육 분야에서 수상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개혁안을 제안하고, 그의 불명예를 보여주려고 했다.
틀렸음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를 몰랐던 니체의 모습에서, 비판과 조언을 통해 타인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의 과거가 떠올라 반성했다.
"운명의 과학"을 읽기 전, 나는 "Everyone can be anything"을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유전이라는 명백한 제약을 받기에 모두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책에서 변화라는 것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기에,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남에게 비판이나 조언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볼 때 드는 짜증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유머러스한 농담?
2. 과학이나 종교와 같은 믿음은 진리일 수 없다. 사실 진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믿음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남을 비판하고 조언했던 내 과거를 다시 한번 반성한다.
"영양의 비밀"의 저자 프레드 프로벤자는 반복되는 믿음의 끝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결국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마저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멋대로 비판하고 조언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듯, 유전의 한계라는 안식에 머무르며 변화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니체처럼,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진 "위버멘쉬"가 되도록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비판 대신 공감으로, 조언 대신 질문으로 모두가 진정한 자신을 찾아낼 수 있게 돕고 싶다.
3. 그러나 사람에게서 안식을 찾으려고 하지 말자. 니체처럼, 진정한 사랑에서 집착을 빼자. 대신에 긍정하는 마음을 넣자.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짜증 내지 말고 긍정적인 농담을 던지자.
"생각풀 뜯길 좋아하는 양, 또다시 등장이오."
어설픈 농담이 짜증 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 라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
엘리자베스는 니체에게서 "라마"로 불렸다. 총명한 여성이었기에 니체는 그녀에게 독립적인 사고를 권하려 애썼다. 하지만, 국가가 아주 뛰어난 개인을 원하지 않듯, 시대는 그녀에게 순종적인 여성을 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여성성을 즐겼다.
무지한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시대의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그렇다를 넘어서 그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20년의 한국은 대입이라는, 직장이라는, 결혼이라는, 출산과 육아라는 틀에 맞춰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길 권장하는 사회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라마"에게 위버멘쉬가 되기를 권장하지 않는 사회와 그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한 "라마"의 결말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 사회는 인종 차별과 나치즘에 물들었고 "라마"는 그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다면 왜 니체의 사상은 독일과 라마를 바꾸지 못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귀족적 급진주의"에서 찾고 싶다. 귀족적 급진주의, 다시 말해 엘리트주의는 라마에게, 대중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기에 니체의 사상은 독일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나치즘 선전에 이용되었다.
대중의 소외라는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주의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위 20%가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파레토 법칙을 고려할 때, 특권 계층이 대부분의 열매를 차지하는 엘리트주의는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족적 급진주의 / 엘리트주의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내 답은 간단하다. 모든 사람이 엘리트가 되면 된다.
방법은? 축을 늘리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철학을 못해도 꾸며내기를 잘하면 된다. 즉,
1. 새로운 분야를 계속해서 발견해야 한다.
2. 각 분야에서 위버멘쉬가 될 수 있게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소통을 통해 위버멘쉬들이 협업하여, 인류가 당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요구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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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원문 작성]
[2025/11/16 편집 후 재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