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頌) -1

연재소설, 송(頌) 1화

by 덤피free dompea ce

전자 담배 대신 연초를 입에 물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좀 전에 편의점에서 담배와 함께 산 일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사람 키 높이의 담벼락이 산을 따라 쭉 늘어서 있고, 맞은편에 ‘정 슈퍼’가 있는 이곳에서는 연초를 피워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이곳이 아니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차선 세 개 정도 될까? 형은 소방도로 너머의 슈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뭉개진 브로콜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리에 앉으면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손바닥으로 귀 뒤를 괴는 버릇이 있는 형은 늘 한쪽 머리가 눌려 있기 일쑤였다. 검은 솜뭉치를 툭툭 떼어내어 동글동글 말아 붙인 듯한 머리에, 앞으로 튀어나온 코와 광대뼈도 마치 머리와 공글린 듯, 그 끝이 동그마했다. 버릇 좀 고치라고 브로콜리도 모자라서 뭉개지기까지 하냐는 내 말에 형은 쳐진 눈꼬리와 올라간 입 꼬리가 만난 동글동글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처음이니까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신 것은 거의 십 년 만이었다. 돼지 갈빗집에서 소주를, 길 건너 호프집에서 골뱅이 무침에 맥주를 마시고 나왔을 때가 열 시를 훌쩍 넘어 있었고, 형을 따라 학교 앞 도로를 걸어서 당구장에 들어간 것이 11시를 넘어서였다.


당구장 소파에 앉자 몸이 땅속으로 쑥 가라앉는 것 같았다. 소주 두 병에 맥주도 거푸 마셔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르바이트생이 가져온 음료수를 얼음째 입에 털어 넣고서야 정신이 좀 맑아졌다. 당구대에 배를 대고 당구공을 잔뜩 노려보는 형이 보였다. 학생 때 당구장에 들르면 형은 개선장군처럼 큐를 짚고 서서 팔을 치켜들곤 했었다. 당구대에 눌린 배 한쪽이 볼록 부풀어 오른 마흔 넷이었지만 당구공을 쏘아보는 눈빛만은 이십 대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 힘 빼. 대충 쳐도 공은 굴러.’


써지지 않는 글에, 바닥난 생활비에, 잡히지 않는 아르바이트와 뜻대로 되지 않는 연애에 대충 뭉쳐 둔 방걸레처럼 구겨져 있으면 형은 예의 그 동글동글한 웃음을 보이며 내 어깨를 탁 치곤 했었다.


당구장을 나와 우리는 이십 대의 어느 밤처럼 학교 앞 거리를 걸었다. 형이 내 어깨를 탁 쳤다.


“뭘 그렇게 심각해. 대충 쳐도 공은 굴러.”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내가 형을 따라, 형이 나를 따라 긴 시간을 걸어 도착한 담벼락. 여름이면 학교 정문에서 목덜미에 땀 기운이 스멀스멀 끼치고서야 도착할 수 있었던 곳. 얼근하게 술에 취한 밤이면 우리의 부푼 오줌보나 울렁거리는 속을 받아주던 곳. 이곳에 오고 싶어서였나, 십 년 만에 학교 정문 앞에서 올 사람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다 돼지갈비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당구장에 간 것이.


담벼락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오르막을 바라본다. 저 길을 따라 오르면 아직 그 방이 거기 있을까? 이제 그만 걸었으면, 더 걸어야 한다면 어디에 잠깐 앉았다 가얄 것 같았던 5층 집. 고동 껍질 같은 계단을 오르기 전에 다시 숨을 골라야 했던 옥탑 방. 창문 방문 다 열어놓고 더위에 지쳐 팬티 한 장으로 늘어져 있으면 슬며시 아랫집 할머니가 올라오던, 술에 취한 밤이면 대 여섯의 청춘들이 누군가의 옆구리에, 무르팍에, 발바닥에 정수리를 또 이마를 붙이고 잠이 들던 방. 아르바이트 비를 받은 날이면 학교 정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기본요금도 넘기지 못하는 거리 동안을 얼마나 신나고 뿌듯해했던가.


담벼락 아래에는 이십 년 전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사시사철 솟아나는 물은 엊그제 끝난 장마로 제법 불어 있었다.


저 물은 어디로 흐르는 걸까?


산에서 솟아날 때는 분명 약수였을 텐데, 그대로 산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적어도 하수구 물이 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물은 흘러야 하고 그래서 세상 모든 물이 한 번은 하수구를 거치게 되겠지. 그것이 물이 가야 하는 길이니까. 그래서 저 물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구름이 일렁이는 바다, 물빛을 머금은 하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저 물은 왜 저렇게 쉼 없이 흐르는 걸까.


오랜만에 피운 연초 탓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져서 손으로 담벼락을 짚었다. 물기를 머금은 이끼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형이 뭘 그렇게 또 혼자 심각하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동그란 웃음 속에 쌓인 까만 눈동자가 측은해 보였다.


그 새벽, 그녀가 짚었던 이끼도 젖어 있었다. 아직 부풀지 않은 그녀의 손자국에 손을 대었을 때, 그녀의 눈물이 내 손에 묻어났었다. 그렇다 해도 아무리 그래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를 구실 삼아 냉장고 안을 휘젓던 거칠면서도 당당하던 그 손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그녀를 빼고 그 밤을 말할 수는 없으리라.


학교 주변의 재개발 바람에도 정 슈퍼는 등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웅크린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슈퍼 쪽을 바라보는 형의 옆모습을 본다. 그 밤의 아이스크림 보따리처럼 부푼 배가 도드라져 보인다.

마흔넷, 마흔둘의 밤에 스물넷, 스물둘의 밤을 생각한다.


< 매거진 Moon> - 10월호에 1, 2화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