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頌) -2

연재소설, 송(頌) 2화

by 덤피free dompea ce

"학교 주변의 재개발 바람에도 정 슈퍼는 등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웅크린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슈퍼 쪽을 바라보는 형의 옆모습을 본다. 그 밤의 아이스크림 보따리처럼 부푼 배가 도드라져 보인다.

마흔넷, 마흔둘의 밤에 스물넷, 스물둘의 밤을 생각한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위를 덮고 있던 함석판은 우리에게 참 별 것도 아니었다. 뜯자! 형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나는 슈퍼 옆 공사장에서 지팡이처럼 휘어진 쇠막대를 찾아왔고, 형은 경첩 옆에 쇠막대를 대고 펌프질 하듯이 경첩을, 자물통이 달린 채로, 뜯어내 버렸다. 뭔가 담을 것을 찾던 형은 티셔츠를 벗어 허리를 묶었고, 우리는 그 안에 아이스크림을 담았다.


샤워를 하다가 무심코 처음 누른 것이 바디워시였을 때, 머리부터 감는 나는 평소보다 팔을 더 세게 문지르곤 한다. 내 몸에 거품이 부풀어 오를수록 감지 못한 머리는 더 거북하고 또 그럴수록 내 손에는 더 힘이 들어가고……. 어딘가 어긋난 듯하지만 딱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빗겨남에 사로잡혀 내 손은 더 오래 더 힘차게 몸 구석구석을 문지른다.


냉장고의 냉기에도 머리에서 흐른 땀이 코를 타고 포장지 위로 떨어졌다. 흉폭함과 희열에 가득 찬 손들이 행진을 멈추었을 때, 형의 웃옷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 있었다. “하드 하나 먹기 힘드네. 자.” 형이 내민 연두 빛 아이스 바를 사양하며 “형이 먼저 먹어”라고 말해놓고 피식 웃음이 났다. “왜 웃어, 임마.” 형도 말끝에 웃음을 흘렸다. “이거나 먹어.” “형 먹어.” 아이스 바를 서로 미루는 우리 꼴이 우스워 우리는 또 웃었다.


정 슈퍼의 냉장고에서 이십 대의 형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확신에 찬 씩씩한 걸음이다. 우리 곁에 온 형은 마흔의 형과 하나로 합쳐졌다.


여름밤이었고, 정문 앞 호프집에서 1차를, 돼지껍데기 집에서 2차를 마친 후였다. 담벼락에 도착해서 숨을 돌리며 담배를 피웠다. 더운데, 하드나 하나 먹었으면 좋겠는데, 편의점은 학교 정문 앞에만 몰려 있었다. 불이 꺼진 슈퍼가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집들도 불이 꺼졌고, 오가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참 반가웠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건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르는 건지, 정말 배포 한번 큰 도둑들이었다. 호기롭게 하드 하나씩을 베어 물고 돌아서다 우리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저 건너 담벼락에 그녀가 서 있었다.


이쯤이었나, 그녀가 짚었었던 것 같은 자리의 이끼에 손을 대어 본다.


신문배달을 나가는 새벽,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던 슈퍼 집 여자. “개새끼. 또 때렸어.” 코끝까지 내린 앞머리 새로 보이던 푸른 멍 자국을 말했을 때, 형은 팔뚝 위에 비키니 입은 여자를 새겨 넣은 슈퍼 사장을 ‘개새끼’라고 불렀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사달이 난다던 정 슈퍼. 저 밑 시장까지 가기 싫어서 계란이나 콩나물 따위를 사러 가면 그녀는 무표정하게 돈을 받고 잔돈을 내밀었다. “500원이요, 저기요, 없어요.” 그녀에게 그 외의 언어는 없는 것 같았다. 낡은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계산대 뒤에 서 있던 그녀는 좀처럼 눈길을 마주하는 법이 없었다. 보라색 정물화,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색으로 기억되었다. “같이 사니께 색시지, 그럼 쟈가 딸이겄어?” 아래층 할머니는 둘을 부부라고 했지만, 스물셋이나 됐을까? 아무리 낮춰 보아도 사십 초반 정도로 보이는 슈퍼집 사장과 부부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어려 보였다. “아빠랜다.” 형이 감기약을 사는 김에 연고나 반창고 등을 사 오다가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은 그녀를 보았다고 한다. 옆에 가봤더니 팔에 멍이 들고 뭐에 긁혔는지 손등에 피가 맺혀있어서 연고를 내밀었더니 멀끔히 형만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눈이 회동그래지더니 움찔 “아빠......”하고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고 했다. 돌아보니 슈퍼 2층 창문에서 사내가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날 형이 보았다던 그 순한 눈과 그것을 감싼 퍼런 멍 자국을 나도 보았다. “저기요, 괜찮아요?” 다물지 못한 입술 사이로 모든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뒤, 담벼락을 짚고 일어서던 그녀는 현기증이 나는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저기......” 말보다 먼저 나간 내 손이 닿기 전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날개를 다친 작은 새 한 마리는 다시 둥지로 돌아갔고, 나는 이끼에 남은 작은 발자국에 내 손을 가만히 올려보았다.


크고 음습한 둥지를 쳐다본다. 우리보다 먼저 떠났던, 하루에 모이 몇 조각만 먹을 것 같았던 그녀는 다시 돌아왔을까?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자 슈퍼도, 담벼락도 어느새 낯설어져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 길 위 어딘가 벼랑 끝 둥지처럼 서 있을 우리의 방은 아직 그대로일까? 아니 우리 모두가 돌아온다고 해도 그곳은 그곳이 아닐 것만 같았다.


“아직 학생이셔서 대출이 어렵습니다. 혹시 담보가 있으시면……. 아, 등록금 고지서를 가지고 오시면 학자금 대출은 가능하십니다.”


나보다 네댓 살 위일 것 같은, 왠지 안쓰러운 얼굴이 일어서던 내 무릎에 힘을 더 빼던, 김순미. 다시 만나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지만 회색 바탕에 검은 글씨는 선명하게 내 머리에 남아 있다. 그 뒤로 대출상담을 받을 때면 꼭 확인하게 되는 그 이름, 김순미. 한 번도 그녀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의자에서 일어서는 내 무릎에는 늘 힘이 빠져 있었다. 대출 직원이 돈을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담보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이자를 내지 못할 형편도 아니었건만 은행에 갈 때마다 구부정한 허리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다리를 채 일으켜 세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의자를 공손하게 밀어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 코 좀 제대로 고는데, 괜찮냐?”


기숙사에서 쫓겨난 내게 형이 먼저 같이 살자고 말했었다. 통금 시간 위반 세 건이 내가 기숙사에서 쫓겨난 이유였고, 3학년 선배들은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새벽 2시에 후배들을 옥상에 집합시킬 수 있게 되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물을 흐렸지만 이제 다시 안정되었으니, 니들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들 생각하고 늘 성실하게 지내라.” 기숙사 대표인 화공과 3학년 선배는 내가 나간 날 밤, 저녁 점호 시간에 나를 미꾸라지라 부르며, 내가 붙인 대자보를 학생들 앞에서 찢었다고 한다.


이제 FTA로 이름을 바꾼 WTO가 대학가를 점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아니, X세대가 신촌 어디 락카페에서 놀고 있다고, 그들은 과일은 오렌지만 먹는다고 했다. 94년, 부산 변두리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 왔을 때,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대학로 가는 길을 물은 적이 있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 여학생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콕콕 찌르고 그냥 가버렸다. 부산에서는 서면이면 서면, 남포동이면 남포동이었지 로(STREET) 개념이 없었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로데오 거리”를 “로데 오(五) 거리”로 알고 있던, TV에서 본 대학로는 특별한 곳일 텐데, 그러면 무슨 문 같은 게 그 앞에 있지 않을까? 그 문을 지나야 대학로 아닌가?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게 94년의 나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여학생의 손가락이 내 정수리를 콕콕 찌르는 것 같다.


“WTO가 국가 경제의 자주권을 뒤흔드는 지금, 지성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의 기숙사에서 전근대적인 군대 문화의 망령에 사로잡힌 집행부는 물러나라! 흐흐흐. 나도 새벽 2시에 너 깨울지 몰라. 그것도 술 먹자고, 그래도 되냐?”


예비역이었던 형과 같이 국문과 2학년을 마치고, 이듬해 96년 여름 입대 전까지 1년 남짓 동거를 했었다. 보증금 1500에 월세 15만 원. 공과금과 부식비를 합쳐 한 달 생활비 40만 원. 옥탑 방 보증금과 등록금을 위해 형의 아버지는 당신의 논, 절반을 팔아야 했다. 지난여름에 납부한 전기료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 우리는 거의 매일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나는 새벽 신문 배달, 학교 식당 접시 닦이, 과외, 택배 물류창고 물품 분류, 주말 경마장 자판기 관리 등의 일을 했었다. 형도 형대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바쁘게 생활했다. 각자 바쁜 낮과 저녁을 보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당구장이나 호프집에서 만나 같이 옥탑 방으로 향했었다.


< 매거진 Moon>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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